NOTICE  |  말많은마리 0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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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듣다 보니 재미있다가 씁쓸했다가 웃겼다가 다정했다가 ... 아무튼 멋있어.

  
"문학을 들려주다"


기 간 : 2007/03/01 ~ 2007/06/28
공연장소 : 이리카페 & cafe FACTORY (홍대입구)
문의전화 : 010-2895-7255
홈페이지 : 없음
주 최 : 프로젝트 이리
티켓가격 : 전석 12,000원
공연시간 : 매주 목요일, 저녁8시


문학을 들려주다에 다녀온 짧은 감상.
이번에 도마에 올라온 두 작품은 정미경,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와 은희경, [빈처].

오픈마루 안테나 사람들과 하루 이벤트로 이리카페에서 하는 '문학을 들려주다'에 다녀왔다.
(작품 안 읽고 갔다. 연극인데, 뭐! 그래도 텍스트가 느껴지는 게 정말 신기하더라 히히)

연극은 문학을 읽어주다, 라는 취지는 좋았지만 사실 이야기하자면 조금 아쉬웠던 부분이 여럿 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각색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취지가 ‘문학을 들려주다’라서 문학을 그대로 들려준 것이었나? 그렇지만 어차피 문학은 그대로 들을 수 없다. 이미 배우들의 입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의 억양과, 그들의 표정으로 한 꺼풀 덧대진 대사들을 눈과 귀로 만나게 된다. 맥락으로 보았을 때 애틋하게 읊어야 했던 부분에서 감상적인 표정으로 연기를 하거나, 글자로 봤을 때 즐거울 것 같은 현학적인 말들을 그대로 늘어놓기만 하여 지적 허영심을 가진 캐릭터가 부각되기 보다는 입에서 웅얼웅얼 뭔가 말이 많구나, 라는 인상만 남았을 때 이미 텍스트는 재구성되어 있었다.

빈처의 남자주인공을 맡은 배우는 그런 면에서 또박또박한 발음을 유지하면서 목소리의 크기로 공간의 긴장감을 조성하고 침묵 역시 대사의 한 부분으로 잘 짜넣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간간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책으로 읽을 때에는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웃을 수 있는데, 배우들이 몸으로 연기를 할 때에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 그들이 이끌어내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느꼈다. 웃어도 될 부분에 웃음이 부족한 경우에는 긴장감이 돌고, 그 긴장감을 메우기 위해 배우는 대사를 중얼거리다가 침묵은 또 다시 어색해지고, 그렇게 되면 연극 도중에 나는 지치고, 후에는 찝찝하다. 제대로 논 것 같지 않기 때문에.

관객인터뷰에서는 온통 좋은 이야기, 문학의 대사를 연극으로 옮겨오는 것이나 연극무대가 아닌 카페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점, 최소한의 소품으로 똑똑하게 극을 꾸민 것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단점으로는 공간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을 꼽고 싶었다. (하기야 이런 기획만으로도 솔직히 말하면 기뻐서 일단 단점은 차치하고라도 마구 좋아해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그렇지만 말을 해보자면) 문학을 그대로 읽어주는 것은 좋지만 발칸의 남자배우와 같은 경우에는 대사 전달력이 정말 현저하게 떨어져서 중간쯤에나 가서야 옆에 있는 저 여자가 아내가 아니라 애인이란 것을 알 수 있었고, 아무리 거리가 가까워도 TV드라마 연기 보는 것 이상의 감흥을 받지 못했다. 연극은 렌즈를 통하는 것도 아니고 가까이 다가가서 들을 수도 없는데, 뭔가 잘 들리지 않는 독백을 듣기 위해 애를 쓰곤 했다.

장점 모두가 뒤집어보면 단점이 될 수 있다. 카페와 같이 좁은 공간에서 호흡을 같이 하는 것이 장점이었고, 또한 실제로도 연극과 같은 무대예술은 무대 아래에서 더욱 빛을 발하며 생기 있게 숨쉰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배우들의 시선이 앞쪽을 향하고 있어 문을 통해 등장할 때는 문 안쪽의 사람들은 전혀 공감할 수 없어 귀만 기울이고는 멀뚱멀뚱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정면에 있었으므로. 꼭 문이 거기 있다고 해서 문을 그렇게 이용해야 하는 것은 아닌데, 그런 면에 있어서 공간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소품이 간단했던 것은 좋았으나 배우들의 차림은 맡은 배역과는 멀어 보여서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 몰입할 때 조금 힘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좀 더 신경을 써서 캐릭터를 살려 놓고 소품을 간소화한 다음 마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관객들에게 더 어필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극 중간중간에 음악 연주하는 분에게 온통 정신이 팔려 눈으로 그 손가락 위를 더듬곤 했다. 손끝에서 기타와 키보드의 음들이 튕겨 나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멜로디언이 그렇게 애절할 수 있다니. (내게는 '멜로디언'이라는 악기 이름조차 너무나 오랜만이라 혀끝이 낯간지럽다. 그, 입으로 호스를 부는 건반악기 말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노래가 나왔을 때, 대사가 가사가 되었을 때, 모두가 한이불을 덮고 있는 기분이었다. 웅숭깊은 호수 아래 마련된 공간에 모여앉아 한이불 주변에 다들 무릎을 감추고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누군가 해줄 옛이야기를 기다리는 그런 기분. 끝나고 모두가 인사할 때 뒤에서 박수만 치고 계시길래, 나가기 전에 ‘음악 정말 좋았어요.’라고 이야기했는데 가볍게 웃으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좋았어요, 정말 두근거렸다니까요. 연극보다 지나치게 도드라지지도 않았고 대사에 잔뜩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고, 설탕이 아주 잘 녹아 들어간 달달한 원두커피를 마신 기분이었습니다.

다음에 또 간다.

4월엔 내가 좋아하는 두 작품, 이힛. 개구리군을 어떻게 읽을지 궁금하다.
(혹시 거기 가시는 분은 인사하세요! 얼굴이 아주 동글동글하고 커트머리에 붉은 뿔테 안경을 쓴 게 접니다. 저보다 둥근 사람 없으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에요 아하하하.)



탁석산 [한국의 정체성]

이 책, 말이 친절하며 지나치게 논의를 확대하지도 않고 딱 고만한 분량에 어울릴 만한 내용을 무리 없이 전개해 나가서 좋았다. 생각이 잔가지처럼 뻗어나갈라치면 재빨리 다른 질문을 던지면서 본론으로 돌아오도록 유도하는 대목이 몇 군데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이와 관련된 [한국의 주체성]을 주문하려다가 목차를 보고서는 조금 망설였다. 그리고 [한국의 정체성]리뷰가 궁금해서 클릭을 해봤다. ‘이안’이라는 사람이 탁석산이 제시하는 것들은 진부하며 대중성에 대해 그런 식으로 협소하게 사고하고 옹호하면 '다수의 폭력'에 대해서 뭐라 할 말이 없다는 글을 남겼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대중 파시즘이 아니지 않은가? ‘한국’이라는 집단의 정체성과 집단의 심리가 분명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에서 탁석산이 대중성을 들고 나오는 이유는 ‘한국’의 정체성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한국인’들과 별개인, 그 자체의 속성을 고찰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대중성은 하나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양식은 ‘한국인’들을 빼놓고 보더라도 법률, 언론, 교육, 건축, 예술 등 변화하는 인간의 가치체계에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정체성은 동일성을 인정받을 때에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성을 고찰하는 작업은 ‘한국’이라는 집단의 동일성을 확보하는 작업, 즉 정체성을 탐구하는 작업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러나 ‘이안’이 말하는 '다수의 폭력'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다. 대중의 파시즘이란 다수의 사람이 의도적으로 권력을 쥐고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대중의 기호가 매스 미디어나 이데올로기에 큰 영향을 받는 때에 대중이 갖는 파시즘적 속성 역시 대중성으로 인정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인가?

전자의 경우, 문화 부분을 고찰하는 데 대중성을 옹호한다고 하여서 그것이 곧장 대중의 파시즘과 다수의 횡포를 옹호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느 학급을 탐구한 결과 운동회 때만 되면 이 반이 옆반과 격렬한 경쟁에 돌입하여 몸싸움까지 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떤 이들은 욕을 하기도 하고 누구는 도발적인 문구를 옆반 벽에 적어놓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학급에서 개별자인 학생들이 표현하는 공격성을 근거로 학급 집단에 공격적(폭력적)인 성격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것이 학급 아이들이 다른 학급 아이들과 맞장 뜬다는 사실을 옹호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도덕적 판단은 별개의 문제이다. 탁석산이 말하는 대중성의 고찰은 어디까지나 정체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대중성을 하나의 요소로 간주한다는 것이지, 대중성 그 자체의 정당함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탁석산이 말하는 대중성 탐구는 주로 문화 예술 분야의 창작물을 분석해서 이뤄지기 때문에 아마 ‘이안’이 말하는 '다수의 폭력 옹호'란 의미상 후자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수의 폭력'이라는 용어만 보자면 다수의 주체성이 강조되어 전자를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중의 파시즘은 그런 의미에서 다수의 폭력보다는 좀더 넓은 뜻의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쪽에서 조금 더 자세하고 친절한 비판을 조목조목 해줬더라면 더 깊은 성찰이 가능했을 텐데, 그렇지 않아서 아쉽다.

애초에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흔히 사람들이 “한국인은 ~하다.”라는 데에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축구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식 집에서 정식을 먹다가 “나는 일식이 좋아. 스끼다시도 그렇고 회도 그렇고 일식은 대부분 마구 섞어놓지 않아서 하나하나 깔끔한 맛을 느낄 수 있잖아.”라는 내 말에 엄마가 대답하셨다. “너는 참 이상한 애다, 찌개 같은 거 안 좋아하고. 너는 한국 사람 아니냐?” “한국 사람이라고 다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 한국에 그런 음식이 흔할 뿐이지. 취향은 사람 수만큼 있는 거잖아.” 그래서 오래 전에 사두었던 이 책을 들었고,(이제 질문이 생겼으니 읽을 때가 되었군!) 시작 부분에서 합성의 오류와 분할의 오류를 통해 ‘한국’과 ‘한국인’을 뚜렷하게 구별하는 데에 상당한 비율의 페이지를 할애하는 저자에게 호감을 가졌다.

[한국의 정체성]에서 제시하는 정체성의 기준—고유성, 창의성—과 정체성 판단의 기준—현재성, 대중성, 주체성— 역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단어들이 왜 꾸준하게 제시되고 있는지 차근차근 짚어 보는 것에 이 책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책에서 제시되는 예들이 진부하다면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정 시간 동안 인정을 받음으로써 가장 간단하고 안전한 표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예들은 그 자체로서는 진부할지 모르겠지만, 잘 구성된 글의 일부분으로서 들어가게 될 경우, 전체적인 글의 콘텍스트가 물 흐르듯 흘러갈 수 있도록 이음새 역할을 해주며 다시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글 잘 쓴다.


+ 이하는 흔히 많은 글에서 대중성과 상업성을 혼용하는 경우를 봤기 때문에 인용해둔다.

대중성은 흔히 상업성과 동의어로 쓰인다. 대중성을 확보했다는 것은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는 것과 동의어처럼 쓰이고 있다. 하지만 양자는 물론 다른 개념이다. 좋은 품질과 저렴한 가격이 상업성의 요체라면 공감대를 자극하는 것이 대중성의 요체이다. 대중성과 상업성을 동일시하는 것은 대중을 얕보는 데에서 비롯된다. 대중이 좋아하는 것을 깔봄으로써 자신의 지적 우월감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의 정체성], 탁석산, 2000, 책세상,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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