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  말많은마리 070808
신인 감독들을 '검증되지 않은'이라는, 피동의 부정형까지 쓴 형용사로 표현한다는 점. -_-

2007-1 헌법(1) 과제2
서준식의 글을 읽고 기본권의 사회적 기능에 대하여 논평하시오.

-_-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인정받아야 한다!’

기본권의 명제는 단호하지만 그만큼 많은 이들에게 의구심을 안겨줄 수 있다. 그와 관련된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명확한 기준을 내리기 위해서 언어를 치밀하고 전문적으로 다듬는 법적 언어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낯설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말도 뒤집어 보면 다른 것, 기본권을 발명한 사상가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좀더 치밀하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이라면 당연히 보장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권리’를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억압받으면 안 돼, 이유 없이 죄의식을 안고 살거나 피해를 받아서도 안 돼, 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을 학문적인 언어로 번역하여 토대(foundation)가 있다는 굳건한 믿음 하에 ‘기본권’이라는 개념을 발명했다. 누구도 헌법에 명시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기본권을 침해 받지 않는다.

기본권의 기능은 크게 주관적 공권과 객관적 규범으로서의 기능으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서준식과 관련하여 기본권을 청구할 권리로 해석하겠다. 사상가들이 더 열심히 닦아서 발전시킨 이론 체계를 관찰해보면, 기본권은 어떤 ‘행위’(법률에서는 가시적으로 드러난 결과에 대하여 다룬다.)를 청구할 권리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소극적 행위(부작위행위), 혹은 적극적 행위(작위행위)의 청구이다. 소극적 행위는 제1기본권의 개념과 뜻을 같이하는데, 자유로운 상태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다. 이 상태에서 나는 이것과 저것을 선택한다, 혹은 선택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 나에게 어떠한 것을 강요하거나, 금지하는 행위를 하지 않도록 청구하는 것이다. 적극적 행위는 제2기본권인 사회적 기본권의 개념과 연결되는데, 실질적으로 법적 주체가 대상에게 어떠한 행위를 하도록 요구하는 권리를 말한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와 다르게 기본권을 침해 받으며 살아간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은 시스템이나 법처럼 인위적이고 명쾌하게 만들어진 간단한 존재가 아니다. 누구도 한 명의 그 자신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현대철학자들에게 빚진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개인이 아니라 맥락에서 새로 구성되는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경험을 통해서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전신에 새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물질적으로 입고 먹는 것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자신의 도덕적 감정을 포함한 감정적 기반 전체를 정당화시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나는 한 사람을 한 명으로 보지 않는다. 그 안에는 무수히 다른 표정과 동정하고 기뻐하는 모습, 비틀어지고 추악한 사람이 있다. 사람은 계속 변한다. 사람을 어느 순간 고정된 존재로 박제화시키면 그 때부터는 웃지 못할 희극이 발생한다.

서준식은 말한다, 당신들은 나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고. 그는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단순한 처분대상으로 박제되는 상황의 웃지 못할 희극에 대하여 말한다. 서준식 앞에서 기본권의 소극적 권리를 청구할 수 있는 기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다. 나는 어떤 하나만 선택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자라온 맥락에 따라 다양한 사상을 접할 기회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사회주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편견으로 주조된 사회주의가 아니다. 단순한 이분법에 온통 나라가 미쳐 겁먹던 시절에 ‘막스’가 온전히 읽히지 못 했음은 당연하다. ‘사회주의’라는 단어 하나에 담긴 그 무수한 원한과 이름 없는 경멸 때문에 서준식은 글을 쓰고 있었다.

법은 쓰려고 만든 것이다. 함께 좀더 잘 살아보자고 만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너무나도 쉽게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고시원에서 밤낮없이 법전을 외우다가, 권력에 잔뜩 겁먹고 움츠러들어서, 태어나보니 그냥 법이 원래 있길래 신경도 안 쓰다가, 먹고 사는 데에 법이 도움이 되지 않아서 등등. 시스템화된 제도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배경에 대한 고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기본권이 당당하게 명시되어 있으면 뭐하랴, 결국은 사람이 살아가는 문제인 것이다. 기본권의 기능이란,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와 존중의 마음을 가질 때만 작동할 수 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부분에서 벌어지는 일들 때문에 이유 없이 개죽음을 당하거나 젊은 시절을 감옥에서 썩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범죄가 떳떳하게 벌어지는 이유는 뭔가? 민주화 20년 주기라고 이한열 열사의 추모제가 떠들썩하다. 어제 TV를 틀어보니 논객으로서의 일 힘들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진중권이 백분 토론에 나와 손짓발짓해가며 이야기까지 하고 있다. 여기서 다음에 무슨 말이 올까? ‘그런데도’ 혹은 ‘아직도’라는 부사 뒤에 ‘기본권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니!’라는 탄식? 그러한 부사는 맞지 않는다.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검은 물들이 바닷속 땅을 얼마나 물컹물컹 훑고 지나다녔는지는 모를 일이다, 수면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할 때는. 기본권의 사회적 기능은 사람들이 그 물컹물컹한 덩어리를 바라보며 무언지 궁금해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돋보기다.
2007-1 양석원 교수님
문화와예술의정신분석

그들의 ‘패싱’

- 뮤지컬 킹앤아이 정신분석,
인종차별에 대한 파농의 거울이론 해석을 중심으로

0620916 조지은


어렸을 때 하루 중 네다섯 시간 정도는 TV앞에서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중에서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디즈니 만화동산’은 특히나 애청자였다. 후에 나이가 들고 나서 머릿속으로 동화를 쓰는데, 그 안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숲속의 오두막이 배경이었다. 디즈니의 사랑스러운 캐릭터들과 금발의 소녀, 중세의 기사가 등장인물로 나오고는 했는데 한 순간 그림이 어긋나서 동화가 깨져버렸다. 아는 인물과 비슷한 성격의 캐릭터를 동화 속에 넣기 위해서 그 사람을 상상 속에 끼워 넣었더니 피터팬에서 보았던 인디언이 자꾸만 떠올랐던 것이다. 이후에 코스프레 사진이나 예수의 사진을 보았을 때에도 깊은 이질감을 느꼈다.

정신분석이 과연 인간의 정신에 대하여 보편적인 이론을 제시할 수 있을까? 정신과 의사이자 혁명가였던 프란츠 파농은 탈식민주의의 틀거리가 되는 <검은 얼굴, 하얀 가면>에서 서구 백인 부르주아의 산물인 정신분석의 한계점을 지적한다. 백인 정신분석가들이 보기에 피식민계층이 꿈꾸는 소총이나 황소, 칼 등은 모두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을지 몰라도 역사적인 맥락에서 그것은 상징이 아니라 실제 소총이고 황소이며 칼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킹 앤 아이’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의 성질을 통해 간단하게 나마 탈식민주의, 인종차별과 관련한 정신분석을 하고자 한다.

킹앤아이의 스토리는 시암의 왕이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영국 여성인 애나를 황실의 선생으로 초청하면서 시작된다. 애나는 계약서에 자신의 집을 받겠다는 조건으로 시암에 오게 되는데, 처음에 이 요청은 무시된다. 그러나 애나는 계속해서 집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보여 왕을 당황하게 한다. 또한 황실의 왕비들은 그녀를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고맙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그녀가 왕을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묘사된다. 영국에서조차 당시 여성의 인권은 남성에 비해 폄하되던 것이었음에도, 애나가 시암 왕과 갖는 계급적 차이는 ‘서구 백인’을 매개로 가볍게 넘어설 수 있는 것이 된다. 애나는 무척 논리적이고 정교하며 능력 있고 빈틈이 없는 여자이다.

반면 애나의 출현으로 인해 시암의 왕은 망설이고 갈등하는 이미지로, 왕비들은 순종적이고 복종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왕은 ‘et cetera, et cetera, et cetera, and so forth’를 반복하며 그 때마다 관객은 웃음을 터뜨린다. 탑팀은 ‘제가 영어를 할 줄 알아서 좋지요?’라고 흐뭇해하며, 한두 줄을 제외한 뮤지컬 전체가 영어로 진행된다. 그 와중에 영어에 서툰 시암왕실의 사람들은 유아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왕비들은 드레스를 입고 수선을 떨다가 왕에게 절을 하고 속치마가 모두 뒤집어진다. 애나는 화난 듯이 안으로 팔짱을 끼고 왕을 바라보며 고개를 젓는다. 관객들이 웃으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부분은 항상 왕이나 왕비의 아이 같고 허술한 모습이다. 여기서 웃는 관객은 누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가?

애나는 시암의 황실에서 일종의 ‘거울’ 역할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왕비들은 모두 애나를 따라서 유럽식으로 입고 행동할 것을 요구 받는다. 처음에 이런 애나의 교육방식은 왕과 왕자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은 영국사절을 맞이하기 위해 ‘야만인으로 보이지 않도록 꾸미는’ 일을 애나가 성공적으로 도와줌으로써 무화된다. 야만인으로 보일까봐 걱정이 된다는 것은 애나가 시암의 문화를 야만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왕 역시 같은 입장에서 야만인으로 보일까봐 걱정이 되어 애나의 도움을 청하게 된다.

파농이 라깡의 거울이론을 해석한 것처럼 시암의 왕실은 ‘애나’를 거울처럼 동일시함으로써 본래 자신의 모습에 공격성을 품고 깊은 괴리감과 열등감을 내재화하며 주체를 형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말 부분에서는 이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출라롱콘 왕자가 ‘두꺼비처럼 절하지 말고 유럽식으로 인사하라’고 하는 장면에서는 시암의 밝은 미래가 올 것 같은 분위기와 화려함으로 무대가 장식된다. 애나가 제공하는 서구식의 거울상이 영국에 시암의 ‘문명화’된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는 성공할 지 모른다. 그러나 애나가 제공하는 모습은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 시암의 동양인임을 자각하는 순간, 괴리감과 열등감이 고개를 들 수밖에 없다.

시암왕실의 ‘문명화된’ 모습은 항상 상상적인 수준에서만 가능하다. 욕망하고 주체하는 상징계로 들어오기 이전부터, 서구문명을 내재화하며 정체성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시암 왕실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애나’로 대표되는 서구인상이 원하는 것을 물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물음은 자신이 아니라 밖으로 향할 수밖에 없으며 스스로를 바꾸고 만들어나가야 할 ‘대상’으로 놓아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안나 프로이트가 말했던 방어기제로서의 자아퇴행 역시 파농이 말했던 것처럼 불가능한데, 시암왕실의 사람들에게 있어 본래의 전통적 가치를 고수하는 것은 ‘두꺼비같이’ 절하는 것이며, 이미 고루하고 구시대적인 것으로 낙인 찍혀 스스로가 거부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전  12345.. 7   다음 

전체 (232)
일상 (99)
감상 (9)
인용 (30)
학교 (19)
단상 (29)
다락 (17)
잡기 (28)

powered by TATTERTOOLS
designed by FOTOWALL
modified by HLDEC

today : 22   yesterday : 56
total : 110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