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  말많은마리 070808
여태까지 내가 본 역자 서문 중에 가장 글래머러스하다. 반갑습니다. 이런 서문 좋아. 이 책을 만나 행운이다.

살다보면 어느 해 어느 순간 지금까지 지녀온 온갖 신념이 흔들리는 때가 있다.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의지해 온 철학이 우습게 무너지는 괴로운 순간들, 그럴 때 인간은 무언가에 몰두하여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쓴다. 어떤 사람들은 술을 마시거나 사람들을 만나거나 여행을 다녀 그것을 잊으려 애쓴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면 헤어진 후의 공허가 견디기 어렵고, 여행을 떠날 처지는 못 되고, 술에 취하면 고통이 한층 더 예리하게 파고들 때는 어떻게 하나.

지난해는 나에게 태어난 후 처음 겪는 아픈 해였다. 몇 해를 두고 준비해왔다는 듯이 한꺼번에 들이닥친 재난들을 나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다. 집 안팎으로 나 혼자서 견디기에는 벅찬 일들이 터지고 그러면서도 누구에게 상의조차 할 수 없던 답답하고 외로운 날들이었다. 책을 읽어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고 글은 더구나 쓸 수 없을 때 나에게 어떤 노동이 필요했다. 불행한 상념들을 거부하는 기게적인 정신노동이 필요했다.

도시락을 두 개씩 싸들고 새벽부터 밤까지 학교에서 살다 오는 딸애를 보며 일 년만 참으면 저 끔직하다 못해 괴기하기까지 여겨지는 고역에서 벗어나리라 믿었다. 한 번도 속을 썩여본 적이 없던 어른 같던 아이였다. 그런데 합격자 발표가 끝난 다음날 눈이 펄펄 날리는데 다시 또 책가방을 메고 도서관으로 가는 애를 바래다주며 나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합격했으면 저 옷 사달라는 건데……>

멋과는 상관 없이 춥지 않은 두툼한 코트를 고르면서 그애가 예쁜 숙녀복을 가리킬 때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지난해 1,2,3,4월…… 그애가 노동하는 만큼 나도 질새라 노동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늘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우리의 삶에 고통과 기쁨은 교차되어 찾아오고 불행은 잘 견디면 행운의 모습으로 다시 오며 지금 겪는 이 실패가 언젠가는 너의 삶에 밑거름이 되어 더 튼실한 울타리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그러나 엄마의 말은 잔소리가 되니까 나는 평소에 아끼던 작은 글들을 모아 들려주고 싶었다. 행복과 불행이 교차되는 평범한 일상에서 때로는 혼자, 때로는 여럿이서 재난을 견디고 남을 이해하는 것을 배워가는 소박한 사람들의 이야기, 특히 가족을 중심으로 한 여성들의 경험을 들려주고 싶었다.

아침 다섯시에 일어나 학원에 보내고 난 후, 혹은 밤 열한시에 문소리를 기다리면서 나는 여성작가들의 단편을 깨알같이 노트에 옮겨 적었다. 이런 저런 내 아픔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딸애의 고통을 나누는 것이 내 고통의 무게를 더는 것이었다.

(…)

1993년, 노랗고 붉은 가을을 기다리며
권택영

- [보내지 못한 사랑의 편지, 도리스 레싱 외 지음, 민음사, 1993]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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