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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을 쓰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 문제는 감수성이다. 오늘 수유너머에 갈까 말까 계속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페이지에 가겠다고 지하철까지 탔는데, 그래도 한 번 용기를 내어보면 경험상 두려움과 떨림의 감정 이후에 무언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숙대입구였고, 몇 번 출구인지 몰라서 조금 헤매다가 나도 모르게 6번 출구를 향했다.
자주 다니는 곳의 출구 번호를 외우지 못해서 매번 빙빙 돌게 마련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지 않으려던 발걸음을 돌려 세운 날은 한 번에 출구를 찾아 버스를 탔다. 머릿속에 생각이 가득했다. 쓰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변을 할까? 내가 가면 다들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한 학기 내내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고 빙빙 도는 것, 신경은 쓰지 않았지만 내 안의 오만함이 그런 관계를 만든 것은 아닐까? 오늘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나? 합평작조차 읽었다고 할 수 없었다.
요즘은 뭐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게 문제였다. 몸을 움직일수록 언어와 사고는 상호작용을 활발하게 하는데, 몸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고민을 자꾸 미루고 넋을 놓고 살다보니 밀려오는 것은 허무함이 전부였다. 고작해야 고민하는 것이란 돈을 어떻게 버나, 정도. 그리고 내가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 금세 잊고 다른 것에 몰두해야 하는 상황이 많았기 때문에, 한 자도 쓸 수가 없었다. 소설을 과제하듯이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러고 있었고, 결국 밤을 샌 끝에 시놉시스를 완성한 해멍을 부러워하며 쓰레기 같은 글을 마주하고 있는 초라한 내 자신을 보았다.
문제는 책이라고, 머릿속에 든 지식이라고 생각했지만 염병할, 그런 것은 정말 두 번째의 문제인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여기, 내가 느끼는 일들에 대한 문제였고 내가 숨 쉬는 공기였고 내가 만지는 것들의 감촉이었다. 일이 바쁠수록 쓸 글이 많아져서 한 동안 희한하게 생각하면서도 신났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때 나의 촉수가 살아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감정에 대해서 들여다보고 그것이 사소하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그러니까 판단하기 이전에 내가 그것을 느끼고 있음을 인정했다. 덜보기 그것이 나의 원동력이었는데, 지금 나는 다른 것이 아니라 감수성이 무뎌졌던 것이다. 아니면 단편적인 기억들로 지난 시간을 대충 미화하거나 들여다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를 보지 않겠다고 이불 속에 숨어 있거나, 엄마와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적당히 타협하고 방에 들어가 신경을 끄고 있던 것들, 그 모든 것들 말이다. 깊게 파고 들어가는 집요함을 한동안 잊고 살았다.
지난 일 이주 정도를 애인 생각에 꽉 차서 그랬다고 핑계 대고 싶지는 않다. 물론 애인에게 제일 마음을 많이 쓰고 함께 지내고 싶기는 했지만, 같이 있는 것이 좋기는 한 반면에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나 허전함이 있었고 그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나를 긍정하고 있다고 말했고, 스스로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자기기만이었다. 불편함에 대한 감수성을 애써 외면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나를 기만했다. 자신을 긍정하는 것은 무조건 낙관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감수성을 제대로 이용하지 않고 무조건 무디게 하려고만 한다면, 나중에는 정말 담배꽁초 하나에 치졸하게 파고드는 인간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이런 것에는 피상적인 수준의 일지 쓰기도 한 몫 했다. 매번 잠들기 전에는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기록하고 성찰할 시간이 있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정말 내가 한 일들과 먹은 것들,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 간략한 메모 이상을 남기지 않았다. 더욱 끔찍한 것은 쓰면서 자기 검열 체계가 작동한다는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최근에 모든 책을 지식을 흡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읽었고 소설에 대해서, 스토리에 대해서는 무감각해 있었으니 합평작이 한 글자도 읽히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
세네 번을 갈아 엎은 끝에도 결국 아무 것도 쓰지 못했다. 일상어와 문학어를 구분 짓기 위해서 나름대로 고민을 하다가 결국 잘못된 길로 손가락을 놀려서 폼 나는 글을 쓰기 위해 만연체를 구사하는 치졸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건 아니다. 집에 들어가면 이런 감정을 모두 잊을 것만 같아 신촌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냐.’ 핑크래빗 합평을 할 때에 닉과 만교님께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는데, 나는 합평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에 죄책감마저 들었다. 두툼한 코트까지 깔고 앉아 있었는데 엉덩이가 따가워서 금방이라도 오줌을 지릴 것 같았다. 섹스, 혹은 자위를 둘러싸고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감수성으로 느끼는 것에 대해 솔직해지고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다 까발려서 쓰면 되는 것이다. 엄청난 충동과 짜릿함, 쾌감, 허무함 그런 감정들 모두 말이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쓴 일지에는 그런 감정이 담겨 있었나?’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리고 다시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존적 정직. 감수성은 도덕적일 필요가 없다.
감수성은,
도덕적일 필요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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