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선경, 주리, 탕이랑 사진 작업할 때 올렸던 나의 연대기. 기억에 남는 것으로 간략하게 작성해보았던 것이다.
1살. 개고기를 먹었다. 내가 개고리를 보며 질겁을 하자 엄마가 말씀하시기를, 어렸을 때 누가 주지도 않았는데 지가 기어와서 다리 잡고 잘 뜯어먹었다고 한다.
4-6살. 무슨 일인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엄마와 싸운 뒤에 울고 있던 동생을 달래놓고 비장하게 가출을 감행했으나 고작 간다는 곳이 삼십 분 거리에 있는 큰아버지댁이었고 결국 다섯 시간 만에 도로 집에 복귀. 동생 옷의 카라를 세워주며 "언니 없어도 잘 지내고"를 중얼거리던 기억이 난다.
4-6살. 좀도둑질. 은박지가 든 색종이 세트가 사고 싶어서 아버지 돈 100,000 짜리 수표를 훔쳐서 책장 사이에 끼워넣었다. 당시 나는 십만원과 만원과 천원의 차이가 0의 개수라는 것 정도 밖에 몰랐다. 그런데 아버지가 지나치게 흥분해서 이게 뭔가 큰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 사업자금이었겠지? 부엌을 뛰어다니는 바람에 할머니에게 귓속말로 '내가 찾아줄까?'라며 마치 내가 찾은 듯이 위장해보려고 했지만, 찾아준다고 해놓고 바로 책꽂이로 직행해서 수표를 들고 나와 엄청 얻어터졌다. 색종이를 사려고 했다고 말했지만 부모님은 어이없어 하며 믿지 않았다.
4-6살. 아버지가 자시던 담배를 몰래 신발장에서 감추고 피우다가 목에 구멍날 뻔.
7살. 톰과 제리에서 폭탄 심지가 타들어가는 것을 보고 영감을 얻어 식탁보 끈에 불을 붙였다가 의자를 다 태워먹다. 거실에서 자고 있던 막내삼촌이 바가지로 물을 퍼서 껐음.
8살. 개를 너무 좋아해서 서점에 가서 개 종류가 빼곡하게 적혀있는 사전 같은 책을 한 권 샀다. 들고 다니면서 전부 다 외웠다. 아픈 강아지를 고쳐주려는 수의사가 되려고 결심했으나 수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개를 해부하는 일도 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기겁했다. 그냥 애견인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강아지 농장을 하시던 고모네에 가서 '빠삐'를 데려왔다.
9살. 6.25사변일에 빠삐가 집을 나갔다. 삼일을 침대에 쓰러져서 밥도 안먹고 밤낮 없이 울다가 실신할 뻔했다.
9살. 식탁보 끈에 불 붙인 것을 글로 써서 상 받다. 글을 감동적으로 쓰기 위해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막내삼촌을 아빠로 바꿔서 써서 내내고, 허용되는 거짓말을 하는 게 무척 쉬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화재로부터 가정을 지키는 정의의 투사처럼 묘사되지 않았나 짐작된다. 이때부터 좋고 나쁜 것은 누군가가 정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9살. 막내동생이 태어났다. 탯줄이 콧물처럼 달려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동생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이 하나도 더럽다거나 힘들지 않았다. 아기들은 시끄럽고 피곤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나도 아기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13살. 중학교에 갔다. 일기를 안 써도 된다는 것에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느라 정신이 없었다. 매 수업시간마다 들어오는 선생님이 달라서 도대체 이러면 어떻게 정을 붙이고 학교를 다닐 수 있을지 궁금했다.
14살. 시험 기간이 끝나면 항상 돈을 십만원씩 받아서 부평에 가 옷을 사고는 했는데, 처음으로 용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경제적으로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을 느꼈다.
14살. 진짜로 한 첫연애.
15살. 지나치게 게임에 중독되었다. 반에서 길드를 만들어 길드장으로 활동하고 새벽 네다섯시까지 게임을 하다가 두시간 정도 잔 다음에 교실에서 눈 밑이 시꺼먼 제군들을 만나곤 했다. 한 번은 아이템을 사기 먹었는데 길드장으로서 쪽팔려서 말도 못 한 채 밤새 엉엉 울기만 했다.
15살. 땡땡이를 엄청나게 쳤음에도 불구하고 무난하게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웹디자인에 빠져서 인터넷 고등학교에 가겠다고 하는데 실업계 고등학교는 다 똑같다며 담임이 질겁하던 것이 기억난다. -_- 2년 전에 복도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싸우던 친구와 제일 친한 친구가 되어서 나란히 같은 고등학교에 갔다. 알고보니 그 친구는 누구보다도 여리고 친절한 아이였다. 역시 사람이건 인생이건 좀 더 살아봐야한다, 고 생각했다.
16살. 어머니를 설득한 끝에 삼년 만에 부모님 이혼에 성공! 영화보다 더 끔찍한 현실에서 조금 더 안전해졌다.
16살. 고등학교 때문에 하숙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집을 나와서 살게 되었다. 바깥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는 핸드폰 하나 뿐이어서 학교에 갈 때 마다 친구들이 하는 말들이 모두 새롭게 들렸다. 별로 할 일도 없어서 어쩌다가 난생 처음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여섯시에 저녁을 먹고 옥상에서 운동을 하다가 일곱시부터는 책을 읽었다. 이문열 삼국지를 독파했다.
16살. 담임이 커플이었던 두 친구의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서 다짜고짜 행동이 불순하다고 이야기를 했다. 뜨악하고 있었는데 부모님께서 맞장구를 치며 친구들을 단속하기 시작해서 더 뜨악했다. 아무래도 학교는 제정신이 아닌 곳이라고 생각했다.
16살. 방송반에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후배들 군기 잡으면서 드디어 나도 같이 미쳐간다고 생각했다.
17살. 엄마의 일기장을 발견. 아빠와 한창 불나게 연애하며 '난 자기 밖에 몰라~'라고 글씨체를 휘갈기던 시절에서 내가 태어나기 직전까지의 하루하루가 적혀 있었다. 똑똑한 척 하지만 사실 엄마는 나보다 훨씬 어리숙했다는 것을 알기도 했고, 나를 임신했을 때 엄마의 심정을 읽으면서 내가 소중한 자식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순진하기만 했던 논산 처녀에 서울에 상경해서 눈에 콩깍지 씌어 결혼하기가 얼마나 쉬운 것인지 절실하게 느낌. 자녀에게 성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8살. 엄마가 술에 취해서 버스 정류장에 드러누워있던 것을 데리고 집에 들어 왔다. 엄마 애인을 알게 되었다. 엄마도 그냥 여자구나.
18살. 인권운동사랑방에 가봤다. 산다는 이유만으로 삶 자체가 투쟁이 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보았다.
19살. 영화제 친구들을 만나다. TV나 컴퓨터 없이도 재미있게 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이에 관계없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김탕과 친구가 되었다.
19살. 여자들이 참 힘들게 산다는 생각을 했다. 캠퍼스에 돌아다니는 '미녀'들을 보면서 남자와 여자가 이렇게 달라졌다는 것을 알고는 내가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멍청하고 똑똑하다는것에 대한 기준이 달라졌다. 나는 내가 정말 중립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단지 내가 테두리 밖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19살. 사람에게는 각자의 리듬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학교 다닐 때처럼 느리거나 빠른 '진도'가 있을 수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