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눈깔을 파버려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무대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지금. 요즘 부쩍 내가 오만하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없다. 서울은 내 자신을 사랑해주는 일만 해도 힘드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고 해멍도 조금 오만하면 어때? 라고 말해주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이제는 정말 어떤 방식이든 잘 모르겠다.
어느 정도 선과 악,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이 항상 있었다. 심지어 그런 것 없다고 말하고 다녔던 지난 일년 동안도 내게 마초는 나쁜 사람, 꼬장꼬장한 어른은 나쁜 사람이었던 것이다. 결국 니체가 말한 것처럼 내 필요에 의해 도덕을 만들고 그래서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런데 나는 우리 할머니에게 뭐라 할 수도 없고, 우리 아버지에게 뭐라 할 수도, 또 내가 아주 싫어하는 모습을 지닌 사람들에게 뭐라 할 수도 없는 혼돈스러운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제 그런 방식의 언어 사용이 거꾸로 내 입을 틀어막고 있으니 샛길로 새어나가고 새어나가서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기를 조심스럽게 시작하는 것 같다. 더 이상 뭐가 맞고 뭐가 틀리고 뭐가 더 세련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든 과시욕이 작용하고 더 멋지게 말하고 싶어하고 '잘' 보이고 싶어하고 그런 것은 똑같으니까 말이다.
자꾸 벗고 벗어서 낮추고 낮춰서 어디까지 갈 지는 모르겠다.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하루하루 부딪히는 일들과 발이 닿는 장소와 눈을 마주보는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을 만나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다듬고 있다. 그래야 지금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내가 만나는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으니까. 아주 얄팍하고 별 거 없어 보이지만, 그렇다.
지금 내가 이런 환경에서 어떠한 방식의 태도를 갖게 되었다고 해서 그게 나를 빛나게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자신이 '리버럴' 하다느니 '래디컬' 하다는 단어를 망설임 없이 끌어온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많은 경우에는 '당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날 예쁘게 봐줘요.'인데 너무 겹겹이 포장한다. 각자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는 어떤 환경에 적응하기를 강요받았다면 그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까?
왜 수업시간에 '자신이 기득권이라고 생각해요?'에 '아니요!'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설령 밥값이 없을지언정 학교를 다니고 옷을 입고 잠을 자고 생업의 길에 뛰어드는 것을 보류할 수 있잖아? 읽고 싶은 책 읽을 수 있고 보고 싶은 영화 보고 강의실에 앉아서 토론하고 말이다.
이해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 비판하는 것부터 배워서 두뇌가 너무 커져버렸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게 '대학 시절의 좋은 경험'이고 '과제'로 남는다면 그건 또 왜 그러는 거지? 선과 악 정의 운운하는 거 보면 이제는 구역질이 나기도 한다. 헌법 시간에 강의를 듣다 보면, 이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법조계에 진출해서 누군가를 단죄한다는 생각에 끔찍하다. 스스로도 냉소적인 사람은 병자같아 좋아하지 않는데 그럴 때면 지독하게 냉소적인 사람이 된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할 때 잘 모르던 사람과 잘 모르는 단체의 생각 없음을 지탄하며 화내는 것은 너무나 쉽다. 왜냐하면 나쁜 놈이고 실제로도 아직도 나쁜 사람이 너무나 많으니까. 생각하지 않고 살며 남에게 아무렇게나 상처를 주는 위험한 언행. 그런데 나서서 지탄하는 것에 첨병이 될 수 없는 것은, 누구 말처럼 내가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서일 수도 있고 단순히 겁쟁이며 소심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또 여기는 어디의 샛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