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  말많은마리 070808
볼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 천 원 짜리 목장갑을 끼고 출사 나갔던 날,
슈퍼마켓 앞에 아저씨들이 술 한 잔씩 하시는 허름한 마루 위엔 찬바람만 훑고 지나간다.
아무렇게나 펴진 신문지 위에는 아주머니께서 까먹으신 귤 껍데기가 나동그라져 있었는데,
선경이가 거기에 카메라를 대고 바싹 마른 그 껍데기들을 사진에 담았다.

나중에 그 사진을 보면서 김탕이 말하길,
"그래, 맞아. 얘는 시들었으니 적어도 썩지는 않겠구나."

그래, 맞아. 말라비틀어진 귤껍데기는 이제 썩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겸손하게 시들었으니 이제 썩지 않아도 된다.
귤껍데기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마루 위 신문지를 아랫목 삼아 할아버지 담뱃불처럼 가만가만 시들었다.


존재가 시드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썩는 것과 마르는 것. 아름다움이 절정을 다한 뒤에도 물기가 남아 있으면 썩기 시작한다, 그것이 꽃이든, 음식이든, 영혼이든. 그러나 썩기 전에 스스로 물기를 줄여나가면 적어도 아름다움의 기억은 보존할 수 있다. 이처럼 건조의 방식은 죽음이 미구에 닥치기 전에 스스로 죽음을 선취함으로써 영속성을 얻으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게 아름다움은 순간적인 매혹의 대상이 아니다. 어서 네 안의 물기를 말려버리라고, 피와 살을 증발시키라고, 어딘가로 달아나라고, 늘 방부제나 건조제를 서둘러 찾았을 뿐이다. 마른 열매와도 같은 정신에 하루 빨리 도달하려고 젊음을 앞당겨 반납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책상 위의 마른 석류를 들여다보니 주변에 검붉은 가루가 흩어져 있었다. 몇 년째 썩지 않는 석류를 보며 '불멸'이라는 말을 떠올리기까지 했는데, 그 단단한 껍질을 뚫고 작은 벌레들이 기어나오고 있었다. 아, 육체란 얼마나 덧나기 쉬운 것인가. 견고해 보이는 고요와 평화 속에는 얼마나 많은 관능의 벌레들이 오글거리고 있는 것인가. 석류를 손에 들어보니 어느새 바람 빠진 공처럼 물렁물렁해져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삶이란 완벽한 진공 포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차라리 안도했다. 그리고 내 풍장의 습관도 앞으로 몇 번이고 생명의 기습 앞에 무릎 꿇어야 하리라는 걸 예감했다.

『사라진 손바닥』, 나희덕, 2004, 문학과지성사 뒷편 산문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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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3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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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3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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