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포트 진행중. 미술관 역사에 대한 책을 잔뜩 빌렸는데 정말 흥미롭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읽을수록 진전된 논의가 나올 틈은 보이지 않고, 계속 구석에서만 빙빙 도는 느낌이다. 아마 이건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책을 읽을수록 좁혀지기 때문이겠지? 새로운 부분을 계속 받아들이는 데에 두뇌를 사용하고 있으니까.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이거나 쓸데 없는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흥미 있는 부분을 파고 들어가면 나중에 또 연결되는 부분이 틀림없이 있을 테니까. 게다가 페이지에서 연미님이 기획전시나 큐레이터십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사실 그러한 논의는 90년대부터, 아니 어쩌면 박물관이 건립된 이후에 제대로 자리잡기도 전에 세계화와 맞물리면서부터 계속 있어왔던 것이었다. 그것을 오늘 책을 읽다가 알았다. 꽤 정리된 내용들이 많이 있었다.
.
역시 중요한 것은 상상력인데. 책 읽고 다른 사람의 말이나 지껄이는 인형이 되고 싶지는 않다.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자란 탓인지 가끔은 정말 아무 생각 없는 수동적인 일을 했으면 하는 생각에, 설거지가 가벼운 여가 생활이 되는 기분이다. 그렇지만 상상력을 발휘해야지. 체질적으로 책에만 갇혀있는 논의들을 보는 것보다는, 명확한 정언명령들의 실천에 경주하는 것보다는 작지만 지금 행복하고, 다른 사람이 행복한 것을 보고, 또 같이 수다 떨고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훨씬 더 실질적으로 느껴진다.
.
요즘 한창 사회과학서적들을 눈이 아플 정도로 읽다 보면 대부분 끝에 남겨지는 나는 이런 것이다. ‘그래서?’ 뭐 어차피 지금 나의 인식은 대개 회의주의나 혹은 불가지론적 입장에 적을 두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이 말이 곧 내가 치밀할 것을 포기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 어쩌라고, 그런 말 해서 어디다 쓰겠다는 거야?’라는 식의 비아냥거림은 탈신비적, 탈권위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사유의 노력 자체를 가치 없는 것으로 몰아붙임으로써 기존의 권력을 한층 더 강화시켜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그래서?’라고 물을 때, 그 뒤를 좀더 치고 들어가기 위한 준비운동으로 기지개를 한 번 펴주는 물음을 던지고 싶다. 그리고 대개 뜨겁게 달궈질 정도로 논의의 끝까지 올라가보면 발은 땅에 떨어져서 둥둥 떠 있고, 결론은 정직하고 우직하게 땅 위에 서서 걷는 일이 아닌가 한다. 이상한 책들을 많이 읽었더니 내 언어가 너무 재수없게 되어 가고 있는데, 뭐 이런 언어로 지금 나를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지 않을까.
.
한동안은 주체에 대해서 고민하게 될 것 같다. 결국 어떠한 문제든 현안을 논의할 때 역사적인 관점에서 조명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것은 역사가 다 누군가에 의하여 구성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적으로 그나마 지난 길을 되짚어보지 않으면 지금을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인이 어떻게 역사의식을 내재화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싹튼다.
읽는 책들의 각주를 보면 온통 서양 철학자들투성인데, 초기에 그에 대한 거부감을 갖던 나도 이미 전제로 깔고 들어가는 것들이 서구에서 정교화된 논리들이니 받아 먹고 들어가는 것이다. 동양에 대해서 강하게 주장할 정도로 동양인의 정체성을 깊게 느낄 만한 계기도 없었고, 황빠들이 부르짖던 지금의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안타까워 눈물이 날 것 같지만, 그래도 동양 철학자들의 사상을 인용하는 것이 신뢰를 얻을 수 있을 만큼 체계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번 목구멍에 걸린다. 이것은 아까 예술론에 대해 이인범님이 쓴 글을 읽다가 ‘공자가 말하기를 예술은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 …’라는 구절을 읽고 느껴지는 왠지 모를 어색함 때문에 찾아온 낯선 감정이었다.
내가 이것에 어색함을 느끼는 것은 이미 공자보다는 부르디외의 의견이 더 신뢰가 갈 정도로 ㅡ 동서로 나눠서 철학의 우위를 논하자는 어불성설을 외치는 것이 아니다 ㅡ 사회화된 내 몸, 구성된 내 몸에서 그나마 어색함이 느껴지던 것은 어떠한 경로로든 동양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몸 속에 혼잡스럽게 뒤섞여 있는 이러한 의식들이 근대화는 곧 식민지화라는 한국의 단절된 역사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요새는 무슨 책을 읽든, 무슨 논의를 살펴보든 계속해서 단절된 한국의 근대사와 마주하게 되어 움찔하며 돌아설 때가 많다.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 역사의식이, 민족의식이 심어지게 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