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 양석원 교수님
문화와예술의정신분석
아래 부분은 영화 <향수>의 '그르누이'를 정신분석하는 소논문 중, 본문의 라캉 관련 분석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위드,베이,해멍,마리 팀의 완성본을 기대해줘요 ;ㅁ;
소외된 자아의 그르누이
라캉의 ‘거울이론’에서 아이는 태어났을 때 자신의 몸을 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는 고유감각이 덜 발달하여서 자신의 신체를 파편적인 것으로 느낀다. 팔, 다리 발가락 등이 따로 느껴져서 시각적으로 그것이 자신의 신체임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가 거울을 봤을 때 자신의 눈에 보이는 완벽하고 총체적으로 연결된 신체는 자신은 스스로 느낄 수 없는 것이지만, 눈으로 보면서 '저게 나구나.'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신체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아이가 거울을 보면서 느끼는 자신은 상상적이다. 라캉은 이것을 인간이 경험하는 최초의 동일시인 상상적 동일시라고 부른다. 상상적 동일시는 최초의 착각이며 오인인 셈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실제 느끼는 것은 다르므로 인간은 여기서 필연적으로 ‘소외’된다. ‘나’에 대해 결정권이 없으며 착각으로만 ‘나’를 확신할 수 있다.
그르누이가 세상을 인식하는 언어는 '냄새'이다. 보통 사람들이 "내가 저 사람을 볼 수 있으니 저 사람도 나를 볼 수 있을 거야.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 거야."라고 생각하는 데 반해, 그르누이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냄새가 나고 그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구나.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내 냄새를 맡고 내가 있다는 것을 알 거야."라고 착각한다. 후에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그르누이는 태어날 때부터 냄새가 없는 존재이다. 이것을 그는 아직 모른다. 스스로에게도 당연히 냄새가 있다고 상상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으며, 자신에 대한 상상적인 이미지를 간직한 자아라고 볼 수 있다.
타자와의 만남
거울을 보면서 '저게 나야'라고 생각하던 아이에게 '엄마'라는 존재가 등장하면서 아이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엄마'는 아이에게 최초의 '타자'이다. 라캉은 이를 대타자(Other)에 상대적인 개념으로 소타자(mOther)라고 지칭한다. 아이가 태어나서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은 무수한 상징들로 이뤄져 있으며, 이것은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 그 세상과 만나게 되는 계기는 '엄마'다. 아이는 엄마와 소통하기 위해서 엄마의 '말'을 배우고 엄마가 그것으로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숨은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엄마가 나타난 이상, 엄마는 거울을 보면서 아이에게 '그래, 저게 너야.'라고 인정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엄마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다면 아이는 불안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 거울 속의 모습이 ‘나’인지, 자신이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전과 달리 세상은 '아이'만 있는 곳이 아니라 '엄마와 아이'라는 둘의 관계로 지탱되는 곳이다. 결국 아이는 혼자서만 상상하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인정을 받아야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나는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고, 엄마가 원하는 것이 되고 싶다. 내가 엄마를 원하는 것처럼 엄마 역시 ‘나’를 원하고 그에 만족한다. 엄마는 완벽한 존재이고 우리 둘의 세상은 균열 하나 없이 깨끗하고 완벽한 알 속의 세상 같다.
영화 속 그르누이에게 ‘엄마’(소타자 mOther)는 그가 처음으로 살해한 빨간 머리 소녀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그르누이가 향수를 뿌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에 도취되어 있을 때 오히려 극심한 외로움을 느끼면서 처음 살해한 빨간 머리 소녀를 떠올리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르누이는 그 소녀에게 사랑 받고 싶어하며 소녀의 향기는 완벽한 것으로 그에게 다가온다. 사랑 받고 싶다는 욕망은 소녀의 향기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그렇기 때문에 향을 보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굳어진다. 그러나 후에 그라스로 가는 길에 머무는 동굴에서 이 생각은 바뀌게 된다.
결핍을 인식한 주체
그라스로 가던 길에 그르누이가 머물게 되는 ‘동굴’은 처음에 아무런 냄새가 없기 때문에 그에게 평화로운 쉼터가 되어주지만, 그 평안은 그르누이가 자신에게조차 아무런 냄새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깨져버린다. ‘내가 생각하던 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없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누구도 나를 무엇으로 느끼지 않는다.' 그는 냄새가 없는, 결핍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타자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 영화에서 그르누이의 이러한 두려움은 꿈 속에서 자신을 보지 못 하고 허공을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을 통해 표현된다. 그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메우기 위해 ‘향수’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라캉의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최고의 향수는 곧 그의 ‘objet petit a’라고 볼 수 있다. ‘대상 소타자 a’라고도 말하는 ‘objet petit a’는 분열된 주체가 영원히 상실하여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면서, 끊임없이 얻기 위해 욕망하는 것을 뜻한다. 이 영원한 상실을 메우기 위하여 주체는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데, 이런 면에서 ‘objet petit a’는 주체와 대타자를 이어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동굴 속에서 쉬고 있던 그르누이가 다시 길을 떠나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제 그는 첫사랑의 향기를 보존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들 수 있는 최고의 향수를 얻기 위해서’ 다시 길을 떠난다. 결국 '동굴'이라는 장소는 그르누이가 단순히 향을 가지고 싶어 하던 상태의 아이였다가, 자신의 결핍을 자각하고 ‘objet petit a’를 발견하는 곳이다.
쥬이상스의 경험과 대타자의 결여 인식
그르누이는 결국 열세 명의 여자를 살해한 끝에 마지막에 가서 최고의 향수를 손에 넣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는 아무 것도 얻지 못 한다. 그르누이는 자신에게 부족했던 것을 향수(objet petit a)를 통해 메움으로써 다른 사람들(Other)에게 사랑 받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향기에 도취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향수에 속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대타자가 아니었다. 광장의 모든 사람들은 그르누이가 바라던 것처럼, 향수 뿌린 그를 완벽한 ‘천사’나 ‘신의 아들’로 착각한다.
이것은 라캉이 말했던 ‘쥬이상스’를 그르누이가 경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쥬이상스’는 고통을 동반하는 쾌락, 쾌락 너머의 고통을 의미한다. 사람은 언제나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는 지점보다 ‘지나치게 느리거나 지나치게 빠르다.’ 라캉은 이것을 ‘미끄러진다,’ ‘접근선적으로 접근한다’고 표현한다. ‘미끄러지는’ 인간은 결코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할 수 없다. 쥬이상스는 완벽한 충족의 지점을 넘어선 쾌락의 과잉을 의미하며, 그 때 쾌락은 고통으로 다가온다. 인간이 쥬이상스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대타자 역시 결핍되어 있다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분열된 주체의 결핍을 완전히 충족시켜줄 수 있는 대타자 역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주체는 언제나 욕망을 만족스럽게 충족시키지 못 한다.
대타자의 결핍을 경험하는 것은, 아이가 엄마 역시 불완전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과 같다. 엄마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면서 아이는 상징적인 세상의 언어를 배우고 타자를 접하게 되지만, 점차 엄마가 바라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아이는 그것이 무엇인지 묻기 시작한다. “엄마가 원하는 것이 뭘까? 아빠일까?” 엄마에게는 아빠가 있다. 아이는 아빠가 엄마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자신만 있으면 만족할 줄 알았던 엄마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견고하던 세계는 아빠의 출현으로 변화한다. 엄마 역시도 무언가를 바라는 존재, 무언가에게 인정받기를 기다리는 불안정한 존재라는 것을 아이는 알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좌절하는 주체는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르누이가 살 방법은 없었던 것일까?
환상
방법은 있다. 대타자의 결여가 분열된 주체에게 (은유적인 의미로 말했을 때, 엄마의 결여가 아이에게) 읽히는 방식에 대해 살펴보면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주체에게 대타자의 결여는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한 가지는 자신에게 전부였던 완벽한 대타자조차 불완전하고 결여되었다는 것을 경험함으로써 주체가 느끼는 충격과 실망감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그 세계의 균열을 틈타고 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온전히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대타자 역시 결여된 이상, 주체는 대타자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에 착안하여 라캉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주체에게 ‘환상’이 불안정한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열쇠라고 말한다.
라캉이 보기에 정상적인 정신발달의 과정을 거치는 인간은, 대타자의 결핍을 경험하고 나서 그것을 환상으로 극복하고 또 다시 착각하면서 끊임없이 다른 욕망을 만들어내는 존재다. 이 과정을 겪고 나면 인간은 자신도 대타자도 모두 완벽하지 않으며 어떠한 욕망도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환상을 통해서 대타자가 완전하다고 착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다. 빈 부분을 환상이 메워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주체는 쥬이상스의 상태에서 벗어나 ‘지나치게 빠른’ 상태에서 ‘지나치게 느린’ 상태로 돌아가 다시 욕망을 추구하게 된다.
그르누이가 쥬이상스를 극복하지 못 하는 이유
그러나 그르누이는 대타자의 결핍을 경험하는 순간 정신적으로 퇴행하여 아이가 엄마의 젖을 물고 있다고 상상하듯이 첫사랑을 만났던 순간을 떠올린다. 이 때 그르누이는 유아적으로 현실과는 전혀 상관 없이 순전히 자신의 만족을 위한 환각적인 상태를 추구하게 된다. 그르누이의 경우에는 앞서 말한 정상적인 정신 발달 과정이 진행되지 못 하고, 애초에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아이가 상상하는 방식으로 정신기능이 퇴행하는 것이다. 그르누이가 쥬이상스를 경험하였을 때 라캉이 말하는 ‘환상’으로 대타자의 결여를 메우고 이것을 극복하지 못 하는 이유가 뭘까?
여기서 "자기 자신은 향수에 매료되지 않았다."는 내레이션이 중요한 단서가 되는데, 이것은 그르누이에게 ‘환상’이라는 해결책이 쓰일 수 없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사람들은 그르누이가 향수를 뿌린 뒤에 그 향기에 현혹되어 모두가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르누이 자신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다. 그는 향수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어떤 요소가 어느 만큼 들어가서 그 향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지 세세한 것들 하나하나를 다 느낄 수 있는 예민한 후각을 지녔기 때문에, 향수는 향수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공기입자에 불과하다는 점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본다. 향수는 훌륭하지만 자신은 결코 그것과 같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 역시 그 혼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르누이는 그토록 꿈꿔왔던 순간에 오히려 극도의 외로움을 느낀다. 향수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에게는 어떠한 환상도 통할 수 없다. 결국 대타자의 결핍을 경험하는 순간 그르누이의 정신은, 쥬이상스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환상’이 아니라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퇴행’을 택하게 된다.
로라의 아버지가 의미하는 것
그르누이에게 마지막까지 칼을 겨누었던 로라의 아버지는 그에게 마지막 희망이었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르누이는 그가 자신을 꾸짖어 주기를, 새로운 ‘엄마’가 되어 다른 것을 욕망하게 해주기를 바라지만(새로운 이자관계) 그마저 향수에 굴복한다. 만일 로라의 아버지가 향수에 속지 않았다면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르누이에게 대타자는 아직 완벽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동시에 그르누이는 새로운 ‘엄마’인 그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 위해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탐색하기 시작할 것이다. 혹은 그의 칼 끝에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르누이는 스스로가 자신을 죽여야 하는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그는 꿈도 환상도 없는 곳, 단지 생존이 삶의 목적이 되는 누추한 파리의 시장—어떠한 환상도 허용하지 않지만 그르누이 자신의 모든 환상이 시작된 역겨운 냄새를 간직한 그곳—으로 되돌아간다. 그곳에서 그르누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온전한 욕망의 대상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먹히고, 생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