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  말많은마리 070808
글쓰기 에 해당하는 글 : 7 개
2007/01/23 :: 두 다리는 건강하다 (19)
2006/12/09 :: 문제는 감수성이다 (17)
2006/10/21 :: 이만교님 만남 (26)

자괴감에 블로그를 없애고 싶다.
누구는 이게 성장해서 좋은 거라지만,
우리 만두가 똥 싸고 바닥에 엉덩이 비비듯이
흔적을 남기는 것 마냥 찝찝하다.
다들 이럴까?

캬학. better than never.


... 라고 27일에 썼는데 3월 1일인 오늘 쑥스런 말들을 잔뜩 듣고 안 닫을 거다!

마블로그에 사람들이 그렇게 애정을 가져주는지 몰랐는데 좋은 글들이 많아서 하루에 다섯 개씩만 봐야지, 라고 생각했다는 부분에서는 두 볼을 손으로 감싸지 않고는 들을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블로그를 열어보고 글이 너무 바보 같고 성의가 없어서 없애버릴까 생각도 하였는데, 내가 인용해 놓은 구절들을 성의 없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에 공감하고 책을 찾아읽기도 한다는 사실에 조금 많이 기뻤다. 그리고 리뷰를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제 많이 바뀌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리뷰를 찾아도 없는 경우가 있어서 종종 당황했으므로,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모든 책에 리뷰가 넘쳐나고 있는 것은 아니란 걸 알았다. 서문처럼 정해진 형식으로 쓰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더 기쁘게 그 책을 기억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일지를 다시 쓰는 것도 그 점과 맞닿아 있는데, 해멍이 인터뷰를 하면서 관계를 쌓는 것은 관계 그 이후라는 말에 줄곧 이런 것들을 생각했다. 기억을 믿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했지만, ‘믿는다’라는 말처럼 액센트를 주지 않아도 내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을 통해, 일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통해서 삶이 조금씩 계속 즐겁게 변화되고 있었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줄곧 버스에서 이 부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까 곰곰이 고민하고 있는 내 모습도.

암튼 좋다, 캬학.

앞으로 당분간은 무엇을 하면서 절박하게 하게 될 것 같다. 절박하게 살고 싶지는 않지만, 언제나 주머니에는 한 움큼의 여유를 갖고 다니면서 휘파람도 불고 하늘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이 허무감은 떨칠 수가 없다. 내가 천재이자 영웅인 나의 세계를 포기하기가 힘들 뿐더러 동시에 내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인정하는 데에서 오는 괴로움이다. 피할 수도 없다. 내 인생이 나에게만이라도 의미가 있기 위해서, 그 생이 생득적인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많다. 평생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한 달 여간 이렇게 고민하고 나서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전보다 다른 것이 덜 무서워졌다는 사실이다. 까짓 무슨 짓을 해도 죽기도 어렵고 망하기도 어렵다. 인생은 언제나 잔인하게 내게 살아있을 것을 요구하고, 간사한 운명은 죽지 않을 만큼 나를 붙들어 놓는다. 무슨 짓을 해도 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을 하다 보면, 굳이 이 밀려오는 허무감을 떨치려고 애쓰면서 나를 갉아먹지 않아도 조금은 삶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이든, 내가 하면서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는 일들을 좀 더 하고 싶다. 그리고 조금은 나를 풀어둘 생각이다. 지난 시간들 동안 너무나 심하게 몰아붙이면서 닥달하곤 했으니까. 2006년보다 2007년은 더 성실하고 여유롭게, 충분히 숨 쉬고 고민할 수 있도록.

요즘 글을 쓰는 게 나한테 그런 일이 아닐까?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밤에 심연의 늪에서 건져올려진 듯이 축축한 두 손으로 아무 이야기든 그저 쳐내려가고 있다보면 어느새 웃게 된다. 그만큼 많이 울기도 하고. <천 개의 공감>에서 읽은 것들이 자꾸 떠오르는데, 과거의 기억을 글로 표현하면서 울거나 화가 나는 것은 그 때 그런 감정들을 충분히 건강하게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맞는 말인 듯 공감하고 있다. 가끔 나는 이십 년 밖에 살지 않은 내 인생에서 오 년이나 지난 일들을 갖고 쓰거나 읽으면서 목소리가 흔들리고 금세 붉은 눈물이 차오르는 것에 당황한다. 막상 나는 그 시기에 겨우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를 화장실에 쭈그려앉아 훌쩍였을 뿐인데. 내 안의 화해하지 못한 부분들이 앙금처럼 남아있다는 것은 그런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렸을 적 동화' '지금 이루고 싶은 꿈' '안다는 것' '어른에 대한 정의' 등등 궁금한 것에 대해 물어보곤 한다. 한 번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죄책감을 느낄 때는 어떻게 해?"

언니가 말했다.
"그럼 ... 글을 쓰지. 밤이 새고 날이 트도록, 아주 길고 긴 글을 써. 정말 끝도 없지 쓰지."

그게 언니의 생존방식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청소녀기의 언니는 언제나 산뜻하고 건강했다. 항상 에너지가 끝도 없이 넘쳤다. 그리고 그 시기의 언니는 지금까지도 내게 말을 건다. 그렇지만 그 때로 돌아가면 언니를 꼭 안아주고 싶다.

오늘은 카페페이지의 리모델링 덕분에 하루 종일 몸을 움직이면서 페인트칠을 하고 찬바람을 맞으며 걸어다니고 책을 나르고 하다보니 하루가 저물어가는 시점에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초콜릿색으로 벽을 칠하는데 정말 사방의 벽에서 초콜릿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것 같아서 괜스레 마음이 따뜻했다. 사다리 위에서 흔들려가면서 두 다리에 내 몸을 받치고 페인트칠을 하는 순간에는 마음이 편안했다. 내가 매우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평생 흔들리면서도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서서 무언가를 할 수 밖에 없으니까. 얼굴이든 손이든 잔뜩 더럽히면서 물렁이는 실리콘도 느끼고 까칠한 나뭇결도 만지면서 벽면을 채워나가야 한다.

내가 글을 쓰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 문제는 감수성이다. 오늘 수유너머에 갈까 말까 계속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페이지에 가겠다고 지하철까지 탔는데, 그래도 한 번 용기를 내어보면 경험상 두려움과 떨림의 감정 이후에 무언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숙대입구였고, 몇 번 출구인지 몰라서 조금 헤매다가 나도 모르게 6번 출구를 향했다.

자주 다니는 곳의 출구 번호를 외우지 못해서 매번 빙빙 돌게 마련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지 않으려던 발걸음을 돌려 세운 날은 한 번에 출구를 찾아 버스를 탔다. 머릿속에 생각이 가득했다. 쓰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변을 할까? 내가 가면 다들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한 학기 내내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고 빙빙 도는 것, 신경은 쓰지 않았지만 내 안의 오만함이 그런 관계를 만든 것은 아닐까? 오늘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나? 합평작조차 읽었다고 할 수 없었다.

요즘은 뭐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게 문제였다. 몸을 움직일수록 언어와 사고는 상호작용을 활발하게 하는데, 몸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고민을 자꾸 미루고 넋을 놓고 살다보니 밀려오는 것은 허무함이 전부였다. 고작해야 고민하는 것이란 돈을 어떻게 버나, 정도. 그리고 내가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 금세 잊고 다른 것에 몰두해야 하는 상황이 많았기 때문에, 한 자도 쓸 수가 없었다. 소설을 과제하듯이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러고 있었고, 결국 밤을 샌 끝에 시놉시스를 완성한 해멍을 부러워하며 쓰레기 같은 글을 마주하고 있는 초라한 내 자신을 보았다.

문제는 책이라고, 머릿속에 든 지식이라고 생각했지만 염병할, 그런 것은 정말 두 번째의 문제인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여기, 내가 느끼는 일들에 대한 문제였고 내가 숨 쉬는 공기였고 내가 만지는 것들의 감촉이었다. 일이 바쁠수록 쓸 글이 많아져서 한 동안 희한하게 생각하면서도 신났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때 나의 촉수가 살아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감정에 대해서 들여다보고 그것이 사소하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그러니까 판단하기 이전에 내가 그것을 느끼고 있음을 인정했다.

실존적 정직. 감수성은 도덕적일 필요가 없다.

감수성은,
도덕적일 필요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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