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  말많은마리 070808
김언수 에 해당하는 글 : 1 개
2007/06/27 :: 김언수, <캐비닛> (20)
p. 182

  우리는 불안 때문에 삶을 규칙적으로 만든다.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삶을 맞춘다. 우리는 삶을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해서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만든다. 습관과 규칙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 말이다. 하지만 효율적인 삶이라니 그런 삶이 세상에 있을까. 혹시 효율적인 삶이라는 건 늘 똑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 기억할 만한 멋진 날이 몇 개 되지 않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여섯 번의 타임스킵 현상을 경험한 임유나씨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의 사라진 시간들은 지금 어디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는 걸까요. 그걸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파요.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누군가를 위해 아름다운 일을 할 수도 있는 시간이잖아요. 사라진 시간 속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낭비도, 폐허도, 후회도, 상처도. 그리고 그 시절을 살았다는 느낌도 없죠."


p. 199

  바벨의 시계 밑에 얌전히 있다보면 몸이 근질근질해지고, 뭔가 아귀가 안 맞고, 인생이 자꾸 꼬여만 간다는 느낌이 들고, 자신도 모르게 멍청한 일을 자주 저지르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멍청해서라기보다는 서로 시간이 안 맞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큰맘 먹고 파시즘의 질서에 따라주려고 해도 질서는 결코 지켜지지 않는다. 모두가 '제멋대로의 시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질서란 게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결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는 우리에게 말한다.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질서는 안 돼. 그러면 모두 깡통이 되어버려. 그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내면의 질서를 조용히 견뎌봐. 내가 각자의 특이성에 맞춰 시계를 줬는데 왜 아무도 그걸 사용하지 않는 거지?"

  이 우주적 가르침에 따르자면 한 개체가 감지할 수 있는 시간의 사이클이란 언제나 '자신의 시간' 단 하나뿐이다. 우리에게 이해심이 부족한 게 아니다. 우리는 애당초 이해란 걸 할 수가 없다. 번개돌이는 달을, 달은 토끼를, 토끼는 번개돌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

  우리가 늘 하는 말은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왜 사랑하지 않느냐,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 내가 너희 만할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너희들은 어쩌자고 이 따위냐? 같은 말뿐이다.


p. 286

  "혹시 그런 문제입니까? 사람들 속에서 외롭다거나, 혹은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거나."

  "외롭다고 느끼는 편이에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시고요?"

  "아뇨, 저는 사실 그 반대 입장입니다."

  "반대 입장이라뇨?"

  "우리는 사실 서로를 너무 잘 이해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별 도리가 없는 겁니다. 그건 이런 말이죠. '당신 외로운 것 알아. 당신도 나만큼은 외롭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그래서 우리는 외로워지는 거죠. 결국 같은 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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