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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1 :: 근대적 박물관 (17)
'메리 앤 스타니제프스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2006:서울, 현실문화연구'의 내용을 토대로 근대적 박물관에 대해 짧게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본래 미완성의 문단들이지만 혹시나 유용할까 해서 올립니다.


근대적 박물관의 탄생

본래 서구문명사에서 대학과 교회, 귀족계급은 지속적으로 그림이나 물건들을 수집해왔으나, 이것들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현대의 박물관 수집품들과는 매우 다른 형태의 것들이었다. 가령 17세기 프라하의 루돌프 2세는 ‘미술의 방’에 맘모스의 상아, 화석, 조개, 거울, 렌즈, 터키 및 헝가리의 말 재갈, 알브레히트 뒤러 와 피테르 브뢰헬 1세의 풍경화 등을 모아 놓았다. 심지어는 ‘하늘에서 헝가리의 폐하 진지로 기적적으로 떨어진 고운 베일’도 들어있었다. 한 마디로 신기한 것은 다 모아 놓은 셈이다. 수집활동은 단순히 보는 여가 생활에 불과하였으며, 귀족들의 사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의 ‘박물관’의 기초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확립되었다. 1820년경 왕후귀족의 컬렉션은 공공의 박물관으로 이행되었다. 미술관이 출현하는 시기와 자율적 영역으로서 예술개념이 성립된 시기 또한 일치하는데, 이 부분은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박물관이 공공의 문화적 시설로 모양새를 갖추면서 ‘공들여 지어진 상징적 건물, 개별적으로 떨어져 있으면서 전시가 가능한 크기의 작품을 그 안에 담고 있을 것’ 등의 조건들이 함께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뚜렷한 경계

일단 선을 긋고 나면 선을 기준으로 공간에 안팎이 생기게 마련이다. 박물관 역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엄격한 경계를 또렷이 하기 시작했다. 먼저, 작품들을 장엄한 박물관 건물 안에 전시할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되면서 일반적으로는 국가나 유파별, 시대별로 작품을 배열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분류법은 근대적 패러다임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국민국가는 18세기 이후에 등장하였기 때문에 국가별 작품 전시가 가능한 것이다.

또 다른 상황을 한 번 가정해 보자. 나는 서울시립미술관에 피카소 전을 보러 가게 되었고, 시대별로 배열된 그의 작품들을 초기작부터 말년의 작품까지 차례대로 걸어 다니면서 감상하였다. 이후에 박물관에서 나온 다음에 내가 하게 되는 생각은 ‘피카소의 작품은 어떠한 경향에서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특히 관심이 가는 작품은 어느 시기의 것’ 정도일 것이다. 작품에 이러한 작가주의적 접근을 하게 되면, 일단 내게 ‘피카소’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으며 시대적, 인종적 맥락과 분리된 차원에서 받아들여진다. 이처럼 작품을 유파별, 시대별로 배열해놓는 것 또한 인간을 ‘자유의지’를 지닌 근대적 주체로서 간주하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내 발로 걸어 다니는 데 내가 보는 것이 온전히 나의 시각만으로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니? 가능하다. 내 눈으로 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내 눈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미 나는 서울시립미술관이라는 별개의 전시 공간 안에서 큐레이터가 기획한 미술전을 보고 있으며 ‘세기의 거장 피카소’라는 홍보 문구를 머릿속에 박아 놓고 그의 작품들 앞에 서게 된다. 또한 대부분의 미술품들은 하얀 벽에 눈높이에 맞춰서 걸리게 되는데, 작품들이 이러한 형태로 전시된 것은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작품을 흰 벽에 걸어 놓음으로써 큐레이터는 미술품을 다른 세계와 분리시켜 날 것으로 우리 앞에 데려다 놓는다. 결국 감상자는 전시기획자가 만들어놓은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길을 걸으면서 그 순서대로 예술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미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미술과 미술이 아닌 것, 그리고 그 외의 사물들이 어떻게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되는가에 대한 연구'를 담았다. 우리가 갖고 있었던 미술에 대한 고정관념의 전복을 시도하는 책으로, 미국의 미술사가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가 집필했다. 1997년 출간된 를 새로 편집하고 칼라 도판을 추가한 개정판.

(앞의 글에 이어서)

내가 다니고 있는 대학ㅡ모든 대학ㅡ은 나에게 신화적, 은유적 상상력을 제공하지 못한다. 오로지 사실적 상상력, 즉 세 번째 부분만을 채워주는 곳이기에 다른 부분은 내가 노력해서 채워야 하는 고유의 몫이다. 여기서 게을러지고 사실적 상상력에 탐닉하게 되면 졸업하고 연봉은 얼마나 받을지, 서울에 30평짜리 아파트를 사기 위해서는 얼마나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취직하기 위해 토플과 토익은 어디서 공부해야 하는지, 라는 수준의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앞의 것들이 나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 오로지 그 수준에서만 매몰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수준부터는 자신이 일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 아래에 놓인 사실을 부지불식 간에 깨닫게 되는 불행한 상황을 맞게 된다. 그 때쯤 되면 정신에 몸이 반응하여 신체리듬도 깨지고, 밥도 안 먹히고, 상상은 커녕 앞으로 남은 마감들 수를 세면서 '이렇게 살아서 뭐하자는건지,' 따위의 불쌍한 자기동정이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좋아서 바친 열정들 앞에서 나는 너를 위해 희생했노라, 하며 '이제는 내 것 아닌 열정들아.'를 외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일이 넘쳐서 주객이 전도된 상황 뿐만 아니라,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부분을 가꾸기 위한 시간이 생활 속에서 따로 마련되지 않는 경우에도 그렇다. 많은 사람들에게 '명상'이 중요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명상'은 자신을 정리하고 앎과 삶을 통일하는 과정이다. 명상이 꼭 요가와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에게 명상은 시나 소설을 읽고, 리뷰를 써야한다는 압박에 상관없이 흠뻑 빠져서 영화를 보고 펑펑 울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정리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하고, 뭐 그런 끄적거림, 망설임, 움츠림 모두가 하나같이 너무나 소중한 명상의 시간들이다. 얼마 전에 또 언제나처럼 끄적거리다가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세 가지 트랙에 따라서 분류해 보기로 하였는데, 신화적 상상력이나 은유적 상상력의 부분이 고갈되면 침울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스케쥴러의 달력을 한 달에 세 페이지 정도 할애하기로 하고 신화적, 은유적, 사실적 상상을 위한 페이지를 따로 기획하려다가, 이 방법보다는 '앎'과 '삶'을 위한 상상의 페이지로 나누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했다. 이제 이 달력을 얼마나 균형있게 채워나갈지, 기획할지가 관건이다.





동양철학 시간에 동서양 지성사의 흐름을 교수님께서 편의상 두 가지 방법으로 설명을 하셨다. 하나는 인간이 지닌 최고의 선물, '상상想像'의 관점에서였고, 다른 하나는 모든 학문이 바탕을 두고 있는 '사실事實'을 통한 정리였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대강 이야기할 때, 가장 큰 차이점으로 보는 것이 앎과 삶의 일치에 대한 부분인데, 동양에서는 철학이 삶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삶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현실에서 유리된 철학은 신뢰를 잃었다. 과거 중국의 관리들이 ㅡ 한국의 선비들이 그러했듯이 ㅡ 철학자인 동시에 앎과 삶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받았는지는 익히 들어왔다. 서양철학에서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그늘 아래에서 현실을 부차적인 것으로 보거나, 감각을 불신했던 그 긴 역사 끝에 16세기가 되고 나서야 '사실'을 학문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다들 F.Bacon에 대해서 말을 하는구나.

1. 사실적 관점

신화적神話的 사실        ->       은유적隱喩的 사실       ->       사실적事實的 사실
(종교적宗敎的 사실)                (문학적文學的 사실)          (과학科學, 철학적哲學的 사실)

2. 상상의 관점

          몽상夢想            ->         환상(영상影想)        ->           공상空想


몽상이나 영상이 신화적 사실이나 은유적 사실과 조응한다는 것은 한 눈에 보이지만, 공상이 사실적 사실하고 조응한다는 것은 평소에 '공상'이라는 단어의 쓰임을 봤을 때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이렇게 보았을 때, 가령 사서四書를 이에 비추어 설명을 해보면, 주자가 '대학大學 -> 논어論語, 맹자孟子 -> 중용中庸'의 순서로 사서를 읽기를 권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논어에서 공자가 항상 구체적으로 대답하는 것을 보았는가? 공자와 제자들의 문답은 짧고 간결한 동시에 매우 함축적이다. 그리고 맹자孟子는 주자가 말했듯이 우리를 '흥분시키는' 문학적, 은유적인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자는 학문에 길을 제시하는 삼강령, 팔조목의 대학으로 큰 틀을 알고나서 논어와 맹자를 읽고, 마지막으로 중용을 읽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신화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사고는 맹목적이며, 실현 가능성과는 상관없이 막연한 믿음을 주는 어떤 것이다. 은유적 사실은 신화적 사실과 사실적 사실의 중간쯤 되는 것으로, 사실에 발을 짚고 서서 신화적 사실을 꿈꾸는 것이다. 이를 테면 현실과 판타지를 연결시켜서 생각하는 것. 문학작품은 은유적사실을 다룬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성사도 그렇듯이 사람 역시도 어느 한 부분만을 갖고는 살 수 없다. 사실적 사실에 찌들어 살다 보면 어느새 꿈꿔온 것들은 잊혀지고 인생은 황폐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몽상만 하면서 살다가는 쪽박차기 십상이다. 결국은 이런 사실들 사이를 오가면서 통찰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철학자는 꿈꾸는 사람이 아니라, '남들 다 하는 것도 해가면서 다른 것도 더 하는' 사람이며 '앎과 삶을 일치시키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 꿈꾸는 대통령, 우주조종사, 천사 등등은 신화적 상상력을 빌린 것이다. 이 때의 상상은 현실과 매우 먼 곳에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정신적인 즐거움 이외에 별다른 것을 우리에게 주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고독과 시련이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조금은 쓸쓸하기 마련이다. 사람이 점점 성장하면서 냉혹한 현실에 부딪히고, 상처를 받으면서 성장을 한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다. 칼날 같은 현실에 부딪혀봐야만, 거기서 비로소 신화적 상상력을 어떻게 현실에서 실현해 나갈지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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