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  말많은마리 070808
2007-1 양석원 교수님
문화와예술의정신분석

그들의 ‘패싱’

- 뮤지컬 킹앤아이 정신분석,
인종차별에 대한 파농의 거울이론 해석을 중심으로

0620916 조지은


어렸을 때 하루 중 네다섯 시간 정도는 TV앞에서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중에서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디즈니 만화동산’은 특히나 애청자였다. 후에 나이가 들고 나서 머릿속으로 동화를 쓰는데, 그 안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숲속의 오두막이 배경이었다. 디즈니의 사랑스러운 캐릭터들과 금발의 소녀, 중세의 기사가 등장인물로 나오고는 했는데 한 순간 그림이 어긋나서 동화가 깨져버렸다. 아는 인물과 비슷한 성격의 캐릭터를 동화 속에 넣기 위해서 그 사람을 상상 속에 끼워 넣었더니 피터팬에서 보았던 인디언이 자꾸만 떠올랐던 것이다. 이후에 코스프레 사진이나 예수의 사진을 보았을 때에도 깊은 이질감을 느꼈다.

정신분석이 과연 인간의 정신에 대하여 보편적인 이론을 제시할 수 있을까? 정신과 의사이자 혁명가였던 프란츠 파농은 탈식민주의의 틀거리가 되는 <검은 얼굴, 하얀 가면>에서 서구 백인 부르주아의 산물인 정신분석의 한계점을 지적한다. 백인 정신분석가들이 보기에 피식민계층이 꿈꾸는 소총이나 황소, 칼 등은 모두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을지 몰라도 역사적인 맥락에서 그것은 상징이 아니라 실제 소총이고 황소이며 칼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킹 앤 아이’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의 성질을 통해 간단하게 나마 탈식민주의, 인종차별과 관련한 정신분석을 하고자 한다.

킹앤아이의 스토리는 시암의 왕이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영국 여성인 애나를 황실의 선생으로 초청하면서 시작된다. 애나는 계약서에 자신의 집을 받겠다는 조건으로 시암에 오게 되는데, 처음에 이 요청은 무시된다. 그러나 애나는 계속해서 집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보여 왕을 당황하게 한다. 또한 황실의 왕비들은 그녀를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고맙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그녀가 왕을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묘사된다. 영국에서조차 당시 여성의 인권은 남성에 비해 폄하되던 것이었음에도, 애나가 시암 왕과 갖는 계급적 차이는 ‘서구 백인’을 매개로 가볍게 넘어설 수 있는 것이 된다. 애나는 무척 논리적이고 정교하며 능력 있고 빈틈이 없는 여자이다.

반면 애나의 출현으로 인해 시암의 왕은 망설이고 갈등하는 이미지로, 왕비들은 순종적이고 복종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왕은 ‘et cetera, et cetera, et cetera, and so forth’를 반복하며 그 때마다 관객은 웃음을 터뜨린다. 탑팀은 ‘제가 영어를 할 줄 알아서 좋지요?’라고 흐뭇해하며, 한두 줄을 제외한 뮤지컬 전체가 영어로 진행된다. 그 와중에 영어에 서툰 시암왕실의 사람들은 유아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왕비들은 드레스를 입고 수선을 떨다가 왕에게 절을 하고 속치마가 모두 뒤집어진다. 애나는 화난 듯이 안으로 팔짱을 끼고 왕을 바라보며 고개를 젓는다. 관객들이 웃으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부분은 항상 왕이나 왕비의 아이 같고 허술한 모습이다. 여기서 웃는 관객은 누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가?

애나는 시암의 황실에서 일종의 ‘거울’ 역할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왕비들은 모두 애나를 따라서 유럽식으로 입고 행동할 것을 요구 받는다. 처음에 이런 애나의 교육방식은 왕과 왕자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은 영국사절을 맞이하기 위해 ‘야만인으로 보이지 않도록 꾸미는’ 일을 애나가 성공적으로 도와줌으로써 무화된다. 야만인으로 보일까봐 걱정이 된다는 것은 애나가 시암의 문화를 야만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왕 역시 같은 입장에서 야만인으로 보일까봐 걱정이 되어 애나의 도움을 청하게 된다.

파농이 라깡의 거울이론을 해석한 것처럼 시암의 왕실은 ‘애나’를 거울처럼 동일시함으로써 본래 자신의 모습에 공격성을 품고 깊은 괴리감과 열등감을 내재화하며 주체를 형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말 부분에서는 이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출라롱콘 왕자가 ‘두꺼비처럼 절하지 말고 유럽식으로 인사하라’고 하는 장면에서는 시암의 밝은 미래가 올 것 같은 분위기와 화려함으로 무대가 장식된다. 애나가 제공하는 서구식의 거울상이 영국에 시암의 ‘문명화’된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는 성공할 지 모른다. 그러나 애나가 제공하는 모습은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 시암의 동양인임을 자각하는 순간, 괴리감과 열등감이 고개를 들 수밖에 없다.

시암왕실의 ‘문명화된’ 모습은 항상 상상적인 수준에서만 가능하다. 욕망하고 주체하는 상징계로 들어오기 이전부터, 서구문명을 내재화하며 정체성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시암 왕실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애나’로 대표되는 서구인상이 원하는 것을 물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물음은 자신이 아니라 밖으로 향할 수밖에 없으며 스스로를 바꾸고 만들어나가야 할 ‘대상’으로 놓아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안나 프로이트가 말했던 방어기제로서의 자아퇴행 역시 파농이 말했던 것처럼 불가능한데, 시암왕실의 사람들에게 있어 본래의 전통적 가치를 고수하는 것은 ‘두꺼비같이’ 절하는 것이며, 이미 고루하고 구시대적인 것으로 낙인 찍혀 스스로가 거부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3-2. 라캉의 ‘거울이론’과 ‘환상’을 이용한 그르누이의 정신분석

1) 소외된 자아의 그르누이

라캉의 ‘거울이론’에 따르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는 자신의 신체를 파편적으로 느낀다. 신체를 보지 않고도 통합적인 것으로 느끼는 고유 감각이 덜 발달하여 팔, 다리 발가락 등이 따로 느껴져서 시각적으로 그것이 자신의 신체임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거울을 보는 순간, 아이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완벽하고 총체적으로 연결된 신체를 보고 ‘저것이 나구나.’하는 믿음을 갖는다. 그러나 아직 아이는 자신의 신체를 통합된 것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가 거울을 보면서 느끼는 자신은 상상적이다. 라캉은 이것이 인간이 경험하는 최초의 동일시라고 주장하며 이것을 ‘상상적 동일시’라고 부른다. 상상적 동일시는 일종의 착각이다. 눈에 보이는 것과 실제 느끼는 것에서 오는 차이 때문에 아이는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소외된다. 아이는 착각으로만 ‘나’를 확신할 수 있다.

그르누이가 세상을 인식하는 언어는 '냄새'이다. 보통 사람들이 "내가 저 사람을 볼 수 있으니 저 사람도 나를 볼 수 있을 거야.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 거야."라고 생각하는 한편, 그르누이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냄새가 나고 그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구나.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내 냄새를 맡고 내가 있다는 것을 알 거야."라고 착각한다. 후에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그르누이는 태어날 때부터 냄새가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한동안 그는 이 사실을 모른다. 그저 스스로에게도 당연히 냄새가 있다고 상상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으며, 자신에 대한 상상적인 이미지를 간직한 자아라고 볼 수 있다.

2) 타자와의 만남

거울을 보면서 '저게 나야'라고 생각하던 아이에게 '엄마'라는 존재가 등장하면서 아이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만난다. '엄마'는 아이에게 최초의 '타자'이다. 라캉은 이를 최초의 대타자(mOther)라고 지칭한다. 아이가 태어나서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은 무수한 상징들로 이뤄져 있으며, 이것은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 그 세상과 만나게 되는 계기는 '엄마'다. 아이는 엄마와 소통하기 위해서 엄마의 '말'을 배우고 엄마가 그것으로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숨은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엄마가 나타난 이상, 엄마는 거울을 보면서 아이에게 '그래, 저게 너야.'라고 인정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엄마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다면 아이는 불안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 거울 속의 모습이 ‘나’인지, 자신이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전과 달리 세상은 '아이'만 있는 곳이 아니라 '엄마와 아이'라는 둘의 관계로 지탱되는 곳이다. 결국 아이는 혼자서만 상상하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인정을 받아야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아이는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고, 엄마가 원하는 것이 되고 싶다. 아이가 엄마를 원하는 것처럼 엄마 역시 ‘나’를 원하고 그에 만족한다. 엄마는 완벽한 존재이고 우리 둘의 세상은 균열 하나 없이 깨끗하고 완벽한 알 속의 세상이다.

영화 속 그르누이에게 ‘엄마’(대타자 mOther)는 그가 처음으로 살해한 빨간 머리 소녀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그르누이가 향수를 뿌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에 도취되어 있을 때 오히려 극심한 외로움을 느끼면서 처음 살해한 빨간 머리 소녀를 떠올리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르누이는 그 소녀에게 사랑 받고 싶어하며 소녀의 향기는 완벽한 것으로 그에게 다가온다. 사랑 받고 싶다는 욕망은 소녀의 향기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그렇기 때문에 향을 보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굳어진다. 그러나 후에 그라스로 가는 길에 머무는 동굴에서 이 생각은 바뀐다.

3) 결핍을 인식한 주체

그라스로 가던 길에 그르누이가 머물게 되는 ‘동굴’은 처음에 아무런 냄새가 없기 때문에 그에게 평화로운 쉼터가 되어주지만, 그 평안은 그르누이가 자신에게 아무런 냄새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깨져버린다. ‘내가 생각하던 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없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누구도 나를 무엇으로 느끼지 않는다.' 그는 냄새가 없는, 결핍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타자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 영화에서 그르누이의 이러한 두려움은 꿈 속에서 자신을 보지 못 하고 허공을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을 통해 표현된다. 그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메우기 위해 ‘향수’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라캉의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최고의 향수는 곧 그의 ‘objet petit a’라고 볼 수 있다. ‘대상 소타자 a’라고도 말하는 ‘objet petit a’는 분열된 주체가 영원히 상실하여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면서, 끊임없이 얻기 위해 욕망하는 것을 뜻한다. 이 영원한 상실을 메우기 위하여 주체는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데, 이런 면에서 ‘objet petit a’는 주체와 대타자를 이어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동굴 속에서 쉬고 있던 그르누이가 다시 길을 떠나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제 그는 첫사랑의 향기를 보존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들 수 있는 최고의 향수를 얻기 위해서’ 다시 길을 떠난다. 결국 '동굴'이라는 장소는 그르누이가 단순히 향을 가지고 싶어 하던 상태의 아이였다가, 자신의 결핍을 자각하고 ‘objet petit a’를 발견하는 곳이다.

4) 쥬이상스의 경험과 대타자의 결여 인식

그르누이는 결국 열세 명의 여자를 살해한 끝에 마지막에 가서 최고의 향수를 손에 넣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는 아무 것도 얻지 못 한다. 그르누이는 자신에게 부족했던 것을 향수(objet petit a)를 통해 메움으로써 다른 사람들(Other)에게 사랑 받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향기에 도취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향수에 속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대타자가 아니었다. 광장의 모든 사람들은 그르누이가 바라던 것처럼, 향수 뿌린 그를 완벽한 ‘천사’나 ‘신의 아들’로 착각한다.

이것은 라캉이 말했던 ‘쥬이상스’를 그르누이가 경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쥬이상스’는 고통을 동반하는 쾌락, 쾌락 너머의 고통을 의미한다. 사람은 언제나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는 지점보다 ‘지나치게 느리거나 지나치게 빠르다.’ 라캉은 이것을 ‘미끄러진다,’ ‘접근선적으로 접근한다’고 표현한다. ‘미끄러지는’ 인간은 결코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할 수 없다. 쥬이상스는 완벽한 충족의 지점을 넘어선 쾌락의 과잉을 의미하며, 그 때 쾌락은 고통으로 다가온다. 인간이 쥬이상스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대타자 역시 결핍되어 있다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분열된 주체의 결핍을 완전히 충족시켜줄 수 있는 대타자 역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주체는 언제나 욕망을 만족스럽게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좌절하는 주체는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르누이가 살 방법은 없었던 것일까?

5) 환상 가로지르기

방법은 있다. 대타자의 결여가 분열된 주체에게 (은유적인 의미로 말했을 때, 엄마의 결여가 아이에게) 읽히는 방식에 대해 살펴보면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주체에게 대타자의 결여는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한 가지는 자신에게 전부였던 완벽한 대타자조차 불완전하고 결여되었다는 것을 경험함으로써 주체가 느끼는 충격과 실망감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그 세계의 균열을 틈타 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온전히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대타자 역시 결여된 이상, 주체는 대타자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에 착안하여 라캉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주체에게 ‘환상’이 불안정한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열쇠라고 말한다.

라캉이 보기에 정상적인 정신발달의 과정을 거치는 인간은, 대타자의 결핍을 경험하고 나서 그것을 환상으로 메우고 또 다시 착각하면서 끊임없이 다른 욕망을 만들어내는 존재다. 이 과정을 겪고 나면 인간은 자신도 대타자도 모두 완벽하지 않으며 어떠한 욕망도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환상을 통해서 대타자가 어딘가에서는 완전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다. 빈 부분을 환상이 메워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주체는 쥬이상스의 상태에서 벗어나 ‘지나치게 빠른’ 상태에서 ‘지나치게 느린’ 상태로 돌아가 다시 욕망을 추구한다.

6) 그르누이가 ‘환상 가로지르기’를 하지 못하는 이유

그러나 그르누이는 대타자의 결핍을 경험하는 순간, 아이가 엄마의 젖을 물고 있다고 상상하듯이 첫사랑을 만났던 순간을 떠올린다. 이것은 그르누이가 환상으로 또 다른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만으로 환각적으로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환상이 욕망을 이끌어서 주체에게 계속 무언가를 좇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아이가 하는 상상이나 환각은 당장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쥬이상스를 경험한 그르누이가 라캉이 말하는 ‘환상’으로 대타자의 결여를 메우고 다시 또 다른 욕망을 추구하지 못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자기 자신은 향수에 매료되지 않았다."는 내레이션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것은 그르누이에게 ‘환상’이라는 해결책이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사람들은 그르누이가 향수를 뿌린 뒤에 그 향기에 현혹되어 모두가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르누이 자신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다. 그는 향수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어떤 요소가 어느 만큼 들어가서 그 향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지 세세한 것들 하나하나를 다 느낄 수 있는 예민한 후각을 지녔기 때문에, 향수는 향수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르누이는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공기입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밖에 없다. 향수는 훌륭하지만 자신은 결코 그것과 같지 않다. 이것을 아는 것 역시 그 혼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르누이는 그토록 꿈꿔왔던 순간에 오히려 극도의 외로움을 느낀다. 향수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에게는 향수를 이용한 어떠한 환상도 통할 수 없다.

7) 로라의 아버지가 의미하는 것

그르누이에게 마지막까지 칼을 겨누었던 로라의 아버지는 그에게 마지막 희망이 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르누이는 그가 자신을 꾸짖어 주기를, 새로운 ‘엄마’가 되어 다른 것을 욕망하게 해주기를 바라지만(새로운 이자관계) 그마저 향수에 굴복한다. 만일 로라의 아버지가 향수에 속지 않았다면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르누이는 새로운 ‘엄마’인 그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 위해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탐색하기 시작할 것이다. 혹은 그의 칼 끝에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르누이는 스스로가 자신을 죽여야 하는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그는 꿈도 환상도 없는 곳, 단지 생존이 삶의 목적이 되는 누추한 파리의 시장—어떠한 환상도 허용하지 않지만 그르누이 자신의 모든 환상이 시작된 역겨운 냄새를 간직한 그곳—으로 되돌아간다. 그곳에서 그르누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온전한 욕망의 대상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먹히고, 생을 마무리한다

2007-1 김선영 교수님
현대철학의문제

프로이트 아저씨의 겸손하게 살기 강좌

0620916 조지은

카프카는 죽기 전에 자신의 저작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친구에게 말했다. 그러나 고맙게도 카프카의 말을 듣지 않고 원고를 살려준 그 친구 덕택에 우리는 지금 “너도 카프카 좋아하니?”라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책을 태워달라고 한 건 카프카가 아니라 프로이트였어야 하는 건데.” 그러게 말이다. 프로이트 아저씨는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생각날 때마다 쓰고, 밥 먹다 쓰고 꿈꾸다 쓰고 진찰하다 쓰고 삐쳐서 쓰고, 쓰고 또 쓰고, 그렇게 해서 엄청난 양의 저작을 남겼다. 이후에 멋쟁이 제자인 라캉은 저작을 단 두 권 밖에 남기지 않았지만 “글자가 살해한다”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 등 도저히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프로이트가 읽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프로이트 아저씨는 소설을 쓰고 계셨다. 영감을 받으면 벌떡 일어나서 쓰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글은 재미있으나 읽고 나면 중언부언한 것들이 많아서 겹치거나 정리되지 않고 께름칙하게 남는 부분이 많다.

프로이트가 글을 썼던 방식처럼 그의 글을 읽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께름칙하게? 정신 바짝 차리고 정독하며 ‘밑줄 쫙, 돼지꼬리 땡땡!’ 하면서 읽을 수는 없는 텍스트다. 그가 서술하는 것들의 전제가 되는 내용들, 스스로 과학자라고 생각하며 정교한 설명을 하기 위해 수정했던 이론의 이음새 등을 기억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특기할 만한 점 중에서는 무의식, 의식이 분열되어 있다는 정신분석학의 뿌리가 되는 발상과 후기의 자아, 이드, 초자아론이 있다. 이 양쪽은 프로이트 이후에 정신분석학파의 발전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안나 프로이트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자아심리학파는 자아, 이드, 초자아론을 그의 최종 이론으로 받아들여 임상 케이스에서 자아를 강화하기 위한 치료를 한다. 대상관계의 멜라니 클라인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정신분석학파 역시 프로이트의 후기 이론을 확장하는 연장선에 있다. “프로이트에게 돌아가자!”고 외쳤던 프랑스 정신분석학의 라캉은, 우리가 프로이트에게 주목할 점이 의식-무의식의 분열에 대한 그의 통찰이라고 보았다.

이 중 내가 프로이트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 내부의 ‘분열’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중언부언한 프로이트 아저씨의 다른 이론들은 모두 차치하더라도, 그 모든 이론의 뿌리가 ‘무의식’이라는 개념에 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용기 있는 발언을 했던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어느 교과서에나 적혀 있는 ‘인간은 존엄하다’는 말, 신에게서 권리를 부여 받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을 과감하게 깨트렸다. 종종 ‘운명’이라고도 표현되는 것들의 밑에는 거대한 ‘무의식’의 뿌리가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을 알기 전까지는 결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다 알았다고 말 할 수 없다고 말이다. 이러한 무의식은 본능이 득시글대는, 언제든지 의식을 삼켜버릴 수 있는 검은 그림자처럼 묘사된다.

이러한 무의식이 생기는 것은 인간이 ‘억압’을 하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서 억압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이는 태어나서 좋아하는 것만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쾌락들 중에서 도덕적, 사회적으로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은 무의식에 가라앉는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를 시작으로 한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유아기가 그의 전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또한 신경학자였던 프로이트는 환자가 뇌의 특정 부분을 자극받았을 때 아주 사소한 부분이더라도 과거의 한 장면을 눈 앞에서 생생하게 재현하듯 기억하고 그 때의 감정을 똑같이 느낄 수 있다는 것 역시 이러한 무의식론의 연장선 상에서 설명한다. 여기서 전의식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 때문에 억압은 1차 억압과 2차 억압으로 나눠진다.

초기에 의식-무의식의 분열성과 대립성에 주목하면서, 강렬하게 금지된 욕망이나 도덕적이지 못한 것들을 무의식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완전한 억압의 1차 억압을 가리킨다. 2차 억압은 의식과 전의식 사이에 있는 검열 체계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은 지금 당장 의식이 주목하지 않는 부분이더라도 언제든지 기억을 끌어올 수 있는 어느 정도 허용되는 것들이다. 의식은 특정 부분만을 비추고 자극을 끊임 없이 받아들이지만, 의식의 영역에서 벗어난 내용들은 곧바로 전의식으로 내려가고, 만일 이것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욕망이거나 고통일 경우에는 무의식으로 억압된다.

프로이트는 위상학적으로나 지형학적으로 무의식에 대해 여러 가지 방식의 묘사를 시도하면서 그의 이론을 조금씩 발전시켜 나간다. 인간들이 대륙에서 지금처럼 판을 치고 살아도 아직까지 들어가지 못 하는 수심의 해저가 있다. 그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땅 위에서 밥을 먹고 친구를 만나며 걸어다닌다. 그러다 땅이 쩍 갈라지고 마그마가 솟아오르면 대재앙 앞에서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의식에는 의식과 다르게 시간도 없고, 현실적이지도 않으며, 쾌락원칙의 지배를 받아 이루고 싶은 각종 소망과 본능 욕구들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다. 무의식은 의식으로는 전혀 인식할 수 없으며 종종 은폐기억을 사용하여 자신의 모습을 감추거나 변장하기도 하지만, 상징적인 기호나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시간성, 쾌락원칙, 타자성, 역동성, 회귀성, 변장성, 비현실성, 비인과성, 비논리성, 기호성, 은폐와 망각 등의 개념이다. 단어만 보아도 부정적인 뉘앙스의 접두사가 가득하다.

“넌 프로이트가 과학이라고 생각하냐?”

같이 강의를 듣는 해멍과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웬만하면 평생 필요한 기본 지식은 다 익히는 중학교 때 과학의 정의에 대해서 배웠던 것이 생각나는데, 그에 따르면 과학은 변수를 통제해서 사물의 원리를 도출해내는 것이었다. 액기스만 뽑아내는 것 말이다. 프로이트는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우기는 부분들이 많아서 과학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교과서적인 ‘과학’의 개념을 현실에 적용하다 보면 그것이 가진 본래의 의의를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닌가?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실증적인 정신 자체만을 과학으로 보면서 어느 정도는 과학에 대한 기준을 조금 더 열어두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프로이트가 말했던 ‘무의식’에 대한 담론 자체가 전통철학에서 생각하던 ‘과학’의 패러다임을 흔드는 것이라서 더 혼란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임상 케이스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하여 생각하고 기록하고 원리를 도출해냈던 프로이트는, 그것에 대해 분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방법론을 차치하더라도 정신만큼은 과학자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처음으로 정신분석학 책을 펴든 것이 작년 겨울이니, 반 년 정도를 어설프게나마 프로이트나 라캉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 같다. 원래 목적은 자기분석이었다. 다른 것은 다 모르겠으나 내 안에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부분,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 때문에 ‘무의식’이나 ‘분열’이라는 말에 끌려서 정신 없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희망적인 말들이나 희망을 강요하는 언어보다 그쪽이 내게는 훨씬 더 정직하게 느껴졌다. ‘아, 정신분석학에서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보려고 하는 거구나.’ 아직도 프로이트가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만, 과학자로서 꼬장꼬장한 자존심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모두의 거부감과 비웃음을 감내했던 점은 후대인에게 칭찬받을 만하다.

‘무의식’의 개념이 가장 나에게 어필하는 점은 시간의 비선형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요즘도 그렇지만 갈수록 사람들은 나이를 먹는 것이 일정한 단계를 거치고 더 나아지는 것이고, 과거의 모습은 추억으로 간직할 줄 아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현인들은 그 최종점에 이르러서 화도 안 내고 화장실도 안 가는 완전무결한 신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대학에 갔어도 나는 아직도 엄마와 반찬문제로 씨름을 하고, 막냇동생 혼자 먹을 간식거리를 갖고 방으로 쏙 들어가면 금방 삐친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 곳에서 다른 경험을 할 수록, 내 안의 시간은 변태해서 새로 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차곡차곡 쌓이면서 범위를 좀더 넓혀 가는 느낌이 든다.

지인들 중에 꿈-분석이나 타로카드를 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무의식론이 지금 얼마나 대중적인지 놀랄 정도이다. 프로이트가 보면 “팔아먹으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라고 소리를 칠지도 모르겠다. 우연찮게도 이 수업과 함께 정신분석 수업을 듣고 있어서 이번 반 학기는 프로이트와 코를 맞대고 보낸 듯한 기분이 든다. 허무주의에 찌들어서 ‘인간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라는 정신분석의 언어에 귀가 솔깃했었는데, 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한동안 들이파다 보니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인간은 그렇게 밖에 살 수 없겠군. 그러나 플러스 알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겨우 이만큼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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