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  말많은마리 0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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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0 :: 호신술로 되겠니 (18)
2007/03/14 :: 오빠라고 불러봐! (23)
2007-1 나임윤경
성평등리더십의이해와실천

호신술로 되겠니

0620916 조지은

세계화가 노동과 맞닿는 지점에서 성별 이데올로기의 개입으로 노동의 성별화가 진행된다는 것이 저자 김현미의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글로벌한 이데올로기에 대해 글을 쓰겠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여기에는 외국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글로벌은 마음 속에 있으니까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던 중 너는 남들에게 도저히 말 못할 것이 있느냐, 너를 많이 드러내야 할지도 모른다, 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딱히 없다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결국 타인들도 나의 확장이라는 생각에 겁먹거나 움츠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조금씩 많은 사람들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그건 나에 대한 이야기니까.

그런데 이게 다른 사람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면 달라진다. 좀더 조심스럽고 위험해진다. 그를 보면서 나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 서술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그의 이야기를 평가하면서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희진이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래서 매우 조심스럽다. 더군다나 이들의 이야기를 학문의 언어로 번역하고 싶지 않다. 생각은 머리로 하더라도 느끼는 것은 피부에서 시작하는 것 아닌가? 희진이가 내 피부에 어떻게 와닿았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멘토가 내게 어떤 일을 제안했다. 그 분은 미디어교육가다. 작년에 함께 미디어교육을 했었는데, 컴퓨터 없는 시골의 아이들보다 도시 빈민층 아이들의 삶이 훨씬 더 정글같고 위험하다는 생각을 해서 도시 변두리 지역을 많이 돌면서 활동을 한다. 소수자의 삶을 공유하는 다양한 방법 중에서 멘토는 함께 살기를 택한 경우이다. 이번에는 작년에 잠시 갔던 곳에 인연이 닿아서 두 명의 중학생과 함께 본격적인 미디어교육을 하기로 했다. 이야기가 먼저 있고 매체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이전에 만났던 경험을 토대로 ‘사진’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글과 말을 나누고 시를 짓고 사진을 찍었다. 말이 미디어교육이지 사실은 peer group 활동이었다.

내가 낯을 가려서 아이들이 처음에는 나에게 빨리 다가오지 못 했지만 나중에 내가 쓴 시를 읽어준 것을 계기로 마음의 벽을 허물게 되었다. 그 시는 개인적으로 내가 처음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던 때의 경험을 쓴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 덕분에 폭력과 가족, 관계, 근대성, 가부장의 담론을 겪을 수 있었다. 집에서 맞고 울고 있는 것은 엄마인데, 동생이 신고해서 집에 왔던 경찰과 옆집 아주머니까지 모두 아버지 말을 믿었다. 괜찮다면 괜찮다고 생각하며 다들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항상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올까봐 무서워했다. 아버지는 호주이기 때문에 어디서든 제도적으로 무한의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루는 밤에 독서실로 도망가 문제집에 코를 박고 동생들을 생각하던 날, 집에 오는 길에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시를 썼다. 뛰는 법을 잊어서 걷고만 있다고. 물론 시는 훨씬 나중에 쓸 수 있었다.

쉼터에서 만난 아이들 중, 한 명은 은미고 한 명은 희진이다. 은미는 먹을 것에 대해서는 정말 온갖 형용사를 쓸 줄 알고 웃는 것도 귀여워서 주변 사람들에게 예쁨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관심이 없는 것에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고 엎드려서 잠부터 잔다. 그러니 선생님은 희진이의 이러한 면만 보고 학교에서 그녀를 싫어했을 것이다. 사진작업을 하는 내내 은미는 시큰둥했다. 은미는 희진이에게 많이 배웠다. 우리는 은미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지만, 보통 때 같으면 하나도 하지 않을 은미가 희진이와 함께 있어서 셋이나 해왔다. 나는 그런 은미가 재미있어서 몰래 웃었다.

희진이는 공부도 잘 하고 성숙한 아이였다. 나는 사진에 자신감이 없는데 희진이는 사진으로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느낌을 담는 데에 놀라울 정도로 능숙했다. 그리고 어색해하는 나에게 웃으면서 언니처럼 대해주었다. 희진이가 지닌 메타적인 시각은 우리를 놀라게 했다. 쉼터에 온 지 일 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자신의 경험을 객관화해서 바라보고 성찰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보였던 자괴감이나 피해의식에 대한 거북함, 공격적인 방어벽 같은 것은 희진이에게 찾아볼 수 없었다.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아이들이 쉼터에 오기까지의 사연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내게는 그것이 무척 힘든 경험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다. 희진이의 새엄마는 희진이를 '팔았다.' 그 말을 듣고 잠을 못 자 침대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그런 아이들의 '아다를 깨고 싶어' 안달이 나겠지. 그리고 편의점에서 우유 사듯이, 택배를 부치듯이, 전화 한 통으로 배달된 중고등학생들을 산다. 개인에게는 일시적인 관계겠지만, 그 한두번의 관계를 위해서 누군가는 많은 수의 아이들을 사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이 있으니 당연히 시장이 형성될 수 있다는 그 개념 없는 암묵적 합의 때문에, 희진이는 몇 달을 집밖에서 지냈다.

이 '대학생 언니'는 비겁하고 겁쟁이라 텍스트로 읽으면서 인권 어쩌고 저쩌고 하는 소리에 솔깃솔깃 하지만, 희진이가 "새엄마도 힘드셨으니까, 그래서 나보고 고등학교 가지 말라고 조금만 고생해서 일하라고, 맏이니까 그러라고 ..." 하는 말에는 무너진다. 상층회로에 있는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나? 무엇이 쉼터 아이들에게 '어른 남자와 함께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있기'를 연습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동생이 어제 뉴스를 보다가 말한다.
“언니, 세상이 갈수록 무서워지는 거 같아. 호신술 정말 배울까 봐.”
“호신술로 호신하려면 5년은 걸린대. 무에타이를 하렴.”
“유도가 제일 좋다는데?”
“그건 아프잖아. 막 들어서 던지고.”
“아프다고 안 배우면 뭘 할 수 있어?”
“사회운동을 해.”

희진이가 가출을 했기 때문에 사진작업은 끝까지 이뤄지진 못 했다. 나는 지금 희진이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 한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대화를 하려고 한다. 그게 누구든지 말이다. 내 경험도 나눈다. 궁금해서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공부를 해서라도 꼭 나름대로 답을 해준다. 그것은 농담으로 던지는 말 한 마디를 ‘오바’해서 해석하거나 히스테리 부리려고, 생색내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머리 꼭대기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뱉는 말 속에, 까딱하는 몸짓에, 무심코 웃어넘기는 농담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어떤 사람들은 말했다. 맞고 살지 말고 신고하면 되지 않느냐? 전화하면 되지 않느냐? 맞서면 되지 않느냐? 참 쉽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쉬운 건데, 내가 신고하지 못 한 것은 미련하게 손이 떨렸기 때문이다. 몸이 굳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들고 놓는 순간이 무섭기 때문이다. 오늘 밤과 내일 아침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이런 때 호신술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희진이가 아무리 태권도를 잘 해도 도움 하나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 위에 나온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2007-1 나임윤경 성평등리더십의이해와실천

어쩌다보니 나 군대 다녀왔네?


0620916 조지은

예리한 친구 해멍의 말. "내가 처음에 알던 너는 좀 더 책에서 보던 말들, 한자어들의 조합을 많이 썼어. 그리고 뭔가 분노에 차 있었어. 딱히 공격적이거나 그랬던 것은 아닌데, 발끈하는 거 있잖아."

나는 정말 화가 나 있었다. 글 읽기와 삶 읽기가 너무나 달랐으니까.

때는 작년 8월 말, 고등학교 방송반의 20기인 내가 졸업하고 나서 22기 아이들의 방송제를 보러 간만에 고등학교에 갔을 때였다. 방송제는 보지 못 했다. 소위 ‘대학 물’ 좀 먹고 나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20기 조지은이 아니었다. 이미 나는 변해 있었다. 더 이상 선배들의 호령 한 마디에 쫄지도 않고, 방송제 때의 단합을 위해서 일 년 동안 매일 아침 7시 15분까지 와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무도 듣지 않는 라디오 방송에 자기들끼리 심취하여 힘들게 80년대 억양을 그대로 답습하던 일들. 내가 변했다는 것을 확실히 모르고 있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가족 같은 사람들을 보러 학교에 갔다가 그만 알아버렸다. 결국은 그 자리에 앉아있기가 힘들어서 밤에 나와버렸고, (별 이유도 없지만 방송제 전날에는 항상 관례처럼 학교에서 밤을 새워야 한다.) 친구에게 전화해서 그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 있는 게 너무 괴롭고 이렇게 괴로워해야 하는 내 자신을 보는 것도 더 괴롭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울먹였다. “내 친구 같은 경우에는 ㅇㅇ예술대학 동아리에 있는데, 거기가 좀 심하다고 소문이 났거든. 그래서 한 몇 년 정도는 손을 못 쓰고 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가서 선후배 앉혀놓고 말을 하게 했대. 그러니까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는데, 그 전까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나도 회의적이야. 그래서 내가 동아리 안 하잖아.”

고등학교 1학년 내 하루 생활. 일단 방송반에 들어가게 되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가서 무조건 아이들과 친해지고 사진을 찍어와야 하고, 담임 선생님과 싸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러나 연애는 안 돼." 우리는 동아리가 아니라 학교 ‘기관’이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 아침 7시 15분까지는 방송반에 집합해있어야 하고, 한 명이라도 늦으면 절대 방송실에 들어갈 수 없다. 선배들은 아침에 서둘러오다가 계단에서 발목을 삐끗하여 붕대를 감고도 달렸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한다. 방송실로 올라가는 램프길에서 선배보다 뒤에 있어서도 안 되고, 선배를 보면 무조건 달려야 하며 같은 기 동료가 있으면 끌고 올라와야 한다. 멀리 보이는 선배가 있으면 달려가서 먼저 인사를 한다. 인사는 허리를 최대한 숙여서 90도가 아니라 ‘폴더’를 만들어야 한다. 선배들은 뿌듯해한다. 우리가 인사를 하지 않고 가면 선배의 친구든, 아니면 선배든 모두 사실은 ‘다 보고 있기 때문에 금방 꼬리가 잡힌다.’ 복도에 서있다가 방송실에 들어가면 선배들이 아침 방송을 준비하는 동안 계속 한 쪽에서 두 줄로 서 있는다. 남자 한 줄, 여자 한 줄. 방송하는 것을 배운다는 명목 하에 두 학기 내내 그런 생활을 하는데, 일상적인 것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느냐에 따라서 군기가 어느 정도 잡혔는지 전체적인 우리의 평가가 난다. 우리보다 4기나 5기 위 정도까지는 정말 때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우리는 정말 좋아진 세상에서 사는 것이다. 행사가 있을 경우에 학원 갈 생각은 애초에 접는다. 그 거대한 입시조차 선배들 앞에서는 무용지물. 한 학년 높은 선배도 학원에 안 간다는데 어찌 감히 우리가? 방송하는 날에는 아침부터 점심까지 계속 굶어야 한다. 안 그러면 마이크에 침 소리가 잡히거든. 입안을 아주 그냥 바짝 말려 놓아야지.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내가 가해자가 된다. ‘너희 왜 인사 안 해? 안 하는 것 보면 다 아는데.’ ‘우리가 그러라고 하기 전까지는 언니 오빠라고 하지 말고 선배님이라고 불러.’ ‘우리가 왜 이러는지 알겠어? 잘 생각해봐.’ 생각하긴 뭘 생각해, 나도 모르는데. 그 밖에도 많은 말들을 했겠지? 지금까지 나열했던 것들을 다 내가 했다고 보면 된다. 후배들에게 이제 말을 놓고 반말 해도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내가 저랬던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도대체 왜 그랬지? 왜 그랬어? 그 모든 것의 이유는 ‘우리도 지금까지 그렇게 했어.’ 죄송합니다. 한 편으로는 가해자가 되어 후배들을 압박하면서, 한 편으로는 여전히 선배들 앞에서 ‘여자 국장’이 아니라 ‘부국장’이라고 소개를 해야 말이 되는 친구의 처지에 가슴 아프다. 기수가 높아져도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 대대로 국장은 남자였고 그들만의 네트워크가 공고하다. 활발하고 선배들과 교류를 잘 하는 남자 아이가 처음부터 ‘국장’이라는 타이틀을 잠정적으로 갖게 된다. 그래도 대학 가면 선배들과 말 트고 친하게 지내며 이 때만큼 좋은 관계가 없다고 한다는 말을 위안 삼는다. 그러나 졸업하고 가보면 남자애들 열심히 뛰어다니는 동안 도시락 챙기고 응원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다. 왜 그렇게 여자선배들이 학교에 오지 않았는지 그 입장이 되니 알겠다. 놀이 문화에서조차 우리가 할 일들이 다 친절하게 정해져 있는 걸.

여자애들이 소외된다는 것을 느끼고 나서 우리보다 나중 기수 아이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여자 엔지니어를 뽑았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 아이가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배우지 못 한 것이다. 왜? 기술 교육을 할 때에는 당연하게도 그 아이만 소외되었기 때문에. 방송반을 담당하는 선생님은 "쓸 데 없이 여자아이들은 많이 뽑아서"라는 말을 하시던 분이었다. 따귀를 양 손으로 마구 갈겨주고 싶었다. 그런데 작년에 방송제에 갔을 때, 동료 중 한 명이 말하기를 "여자애들이 왜 기계실에 가 있어?" 이 자식도 따귀를 마구 갈겨주고 싶었다. 그럼 안 되냐, 그럼 안 되냐고. 이 자식아 그럼 안 되냐고. 후배애들까지 우리가 하던 것처럼 핀 조명 옆에서 부채질이나 하고 걸레질하는 것에 만족해야 하냐. 음식하고 음료수 사서 기계실에 나르는 것만 해야 되냐. 아무리 '씩씩한' 남성적인 여자가 되어도 '너 앰프도 옮길 수 있겠다.' 정도 소리 밖에는 못 듣는다.

군사주의 논문을 읽는 내내 마음 한쪽이 따가웠다. 그 때는 다 말이 되었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도 아귀가 맞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맞는데, 왜 그 생각을 그 때는 못 했지? 우리는 ‘학교 기관이라 다른 동아리 애들과 다른 방송반’이기 때문에 이미 그 앞에서는 판단중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된 일들을 참고 견뎠던 것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 같은 것이 있어서, 만일 내가 말도 안 되는 일에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임했다고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되어 힘들다. 방송반은 자생적인 조직 그 자체가 되어서 군기 잡을 때는 방송제를 들먹이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선후배 간의 견고한 애정을 담보로 한다. 테크놀로지가 좋아져서 더 이상 그 많은 인원들을 뽑을 필요도 없는데, 선배 챙겨주는 일이 만만치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인원 수는 더 많아진다. 선배들의 기념일이나 수능 백 일 같은 것은 당연히 거창하게 해주고, 그 선물이 얼마나 화려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1학년 아이들은 고3 수능 백 일 때 일종의 쇼를 준비하는데 남자 아이들은 차력을 하기도 하고 개그 프로 흉내를 내거나 춤을 추는 등 선배들을 최대한 웃겨서 ‘기분 좋게 해드려야’ 한다. “우리는 적어도 웃기는 일은 안 한다.” 공군에 복무해서 그나마 편하게 지낸다는 애인이 전화하면서 말하더라. 그러고 보니 나는 군대 다녀왔다.

“20기 조지은 선배님이시죠? 저는 23기 후배 ㅇㅇㅇ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아, 네. 못 갈 것 같아요. 방송반 위계적인 것 때문에 많이 힘들죠?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네?”
“지금 그렇게 힘들 게 지내는 것, 저도 전화하고 뭐 하고 다 해봐서 알거든요. 근데 정말 안 그래도 되는 건데. 어쨌든 저는 방송반 모임에는 못 갈 것 같아요. 나중에 따로 보게 되면 반갑게 인사해요.”
20기 조지은의 역량은 여기까지이다. 부끄럽지만 이런 글을 내 블로그에 올리면 후배 중 누군가는 와서 보지 않을까? 선배 중 누군가는? 선배, 그건 이상적인 것들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것들이에요. 우리가 살았던 방식이 비현실적이라고요. 선배에게는 아직도 그것이 현실인가요? 안 그래도 되잖아요. 아, 젠장. 그래도 그게 아직까지도 통하는 세상이다, 나이를 먹어도. 정말 대한민국은 군대다. 아무튼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하면 똥꼬에 힘 빡 주고 살벌하게 따귀를 갈겨 줄 테다.
2007-1 나임윤경 성평등리더십의이해와실천

오빠라고 불러봐!

0620916 조지은

얼마 전 다른 수업에서 ‘당신을 표현할 수 있는 한 단어’를 대보라고 하였는데, 스스럼없이 ‘마리?’라는 물음이 머릿속에 둥실 떠올랐다. ‘마리’는 내 닉네임이다. 2006년부터 쓰게 된 마리라는 이름으로 엮이는 관계들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다. ‘마리’는 친구도 많이 사귀었는데,(눈물 나게 쑥스러운 3인칭!) 나는 그들의 나이가 얼마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과나 학번 같은 것은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되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데 매번 까먹고서는 ‘너 그렇게 늙었었냐?’하며 눈이 동그랗게 놀라곤 한다. 영화제를 기획하면서 만나게 된 친구들 중에서는 알고 보니 같은 학교라서 ‘이게 웬일?’ 했던 적도 있다.

그 중에 지금 군대에 가 있는 ‘싱크’라는 친구가 있는데, 입꼬리나 눈꼬리가 웃을 때 야무지게 올라가면서 정말 ‘꾸밈 없다’는 말이 잘 들어맞는 친구이다. 매번 뭐 먹으러 갈까 고민을 하면 이것도 싫고 저것도 못 먹는다며 투덜거리다가, 막상 먹으러 들어가면 말 그대로 제일 많이 먹어서 밥 먹으러 갈 때 메뉴에 대한 싱크의 말은 다들 귓등으로 듣는다. 그럼 또 ‘나 원래 말은 이래도 아무 거나 잘 먹잖아.’라며 속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웃음소리를 껄껄거린다. 가끔 ‘나 진지해!’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영화를 찍기도 하고, 앞으로도 계속 찍고 싶어한다. 능구렁이 같은 구석이 있긴 하지만, ‘내가 나이가 많다고 너에게 이런 말을 하면 조언처럼 들려서 하기가 조금 고민되는데…….’라고 상대방을 먼저 배려해주는 세심함에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참 원숭이 같은 자식들만 보던 때라,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동물의 세계에 들려오던 그 말은 잊을 수가 없다.) 장정일의 어렸을 적 꿈이 동사무소 같은 곳의 공무원이 되어서 일찍 끝나면 집에 돌아와 발 씻고 누워서 책이나 하루 종일 보는 것이라는 대목을 읽고서는 바로 싱크를 생각했다. 요즘에는 자대에 들어가서 자주 전화를 하여 안부를 묻는데, 군기가 덜한 부대에 가서 선임병들에게 애교도 부리며 역시나 사막에 떨어지면 모래에게 말을 걸 수 있을 것 같은 능청스러움으로 등 따습고 배 따습게 잘 지내는 것 같다. ‘처음부터 싱크의 모습을 다 보여주면 좀 그렇잖아. 음무아하하!’ 심지어 인터넷도 하는 걸.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싱크는 YBS에서 우리는 모르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제작팀장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거기에서는 실명을 사용하고 선후배 관계도 철저한 편인 것 같다. 그러던 중 옷깃만 스쳐도 파릇파릇하다는 새내기 내 친구가 YBS에 신입부원으로 들어가면서부터 ‘아, 네가 말하는 게 승구 오빠지?’라며 호칭으로 이상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나는 친구에게 반말을 하고 싱크에게도 반말을 하는데 그 친구는 싱크를 오빠라고 하며 어려워한다. 승구 오빠라……. 승구 오빠? 세상에나, 그건 다른 사람이다. 내가 싱크를 오빠라고 불렀다면 그가 군에 가서 나한테 살갑게 전화하며 수다를 떨 수 있었을까? 대답은 최대한 입을 오므렸다 펴며 ‘오우, 노우’다.

물론 어떤 사람이 나와 절친한 사이가 된다면 그를 내가 오빠라고 부르든 주머니라고 부르든 성격이 더럽든 착하든 많은 것이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데, 문제는 처음에 관계를 맺을 때 호칭이 그 이후의 행동반경을 결정해버린다는 것에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 (조금만 일찍 태어나면 자동으로 오빠이기 때문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내게는 무수한 옵빠옵빠옵빠들이 있지만, 그들과 나눈 대화 중에 내가 각별하게 기억하는 것은 정말 단 한 마디도 없다. 매번 만나면 하게 되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 나이든 사람 유세하기, 듬직한 오빠의 능력을 보여주기 등 하나도 안 멋있는데 미간에 힘주는 그들이 안쓰럽다.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언어적인 부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내 머릿속에 자신의 어록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은 나와 관계를 맺었다고 말 할 수가 없다. 내가 한 문단을 주야장천 싱크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계속 하라고 하면 정말 계속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와 5년을 알고 지낸 어느 오빠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 --오빠?”
뿐이다. 만나면 그냥 묵묵히 먹기나 해야지, 삼겹살이든 보쌈이든. 그리고 계산서는 오빠의 넓은 가슴으로 품어주세요.

나는 맏이라서 친척오빠들을 제외하고 혈족 이외의 사람들에게 ‘오빠’라는 호칭을 써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애교도 없어서 예쁨 받는 후배가 아니었기 때문에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친구들이 교회에서 오빠, 오빠 하며 연애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질 못 했다. 프로이트를 읽다가 강의에 들어가서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1차 억압된 성욕을 실현시키려는 것인가?’ ‘근친상간이다, 근친상간!’ 근데 성실하고 착하고 예쁜 내 교회 친구들이 근친상간을? 나이 많은 사람과 연애하며 오늘은 오빠가 뭐 해줬어, 라는 자랑을 하는 친구가 그렇게 유치해 보일 수가 없었다. ‘네가 방금 말한 오빠는 그 오빠냐, 친오빠냐?’ 종교에 회의를 품고 교회에 발길을 끊게 된 것에 교회 내부의 연애질은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아무리 봐도 교회에서 짝짓기하는 것은 꽤나 원칙주의자였던 어린 내 눈에 곱게 비칠 리가 없었다. 그들은 ‘to go to church’가 아닌 ‘to go to the church’를 실천하며 정관사에 하나같이 ‘연애’와 함께 ‘오빠’라는 단어를 치렁치렁 끌고 다녔다.

단순히 권위적인 맥락에서 ‘오빠’라는 단어가 거북한 것이었다면 교회의 언니, 선생님, 형 등 이름 아닌 모든 호칭이 똑같이 불편했어야 하는 건데, 유독 오빠라는 말만 혀끝이 망설여지던 단어였다. 언어로 의식화되지는 않았지만, 몸으로 거북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게다. “처음에 신입생 애들 보러 내려갔을 때, 딱 보고 ㅇㅇ랑 ㅇㅇ가 예쁘다는 생각 들던데?” 고등학교에 가서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알게 된 ‘오빠’가 나중에 내게 한 말이다. 그리고 예쁜 여자 후배들이 많이 뽑혔나 보러 왔던 선배의 이 말을 계기로 ‘오빠’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뉘앙스를 알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 앞에 내가 별로 고마워할 필요가 없는 정관사가 붙는다는 것을. 처음에는 매번 남자 선배들을 부를 때마다 자꾸 그 야릇한 기분이 느껴져서 찝찝했고, 익숙해지기 위해서 부러 더 자연스럽게도 뱉어보고 씩씩하게 불러도 보았다. 아이고, 고생했다.

울렁이는 가슴을 다독이며 역지사지 해보자면, 왜 그 많은 오빠들이 스스로 관계에 부담을 씌우면서 미간에 힘주기를 고집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신부를 안고 빙빙 돌려대는 신랑의 모습을 상상하며 근육을 키울 때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프로이트는 인간 정신의 기본 원칙을 발견하기 위해서 신경증을 정신분석 했다는데, 그 비슷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내가 자주 써먹는 법은 휑뎅그렁한 세상에 나와 남이 함께 있는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감각을 발휘하여 처음에는 머리가 길군, 콧구멍에 오백 원짜리도 들어갈 수 있겠군, 하는 생각들을 하겠지만 말을 하게 되면서부터 제한적이나마 나와 그 사람은 다른 차원의 관계 맺음으로 갈 준비를 한다. 둘만 있다고 치면, 우리 둘이 친구가 되기 위해서 굳이 나이나 위계에 따른 호칭이 필요할까? 아무도 없는데 ‘오빠라고 불러봐!’는 너무나 쑥스러운 외침 아니던가? 나는 그 편이 훨씬 더 솔직하고 정직하게 느껴진다. 반방에서 밥 사주던 오빠들이 내게 인생이 외롭고 세상은 황량하며 자신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차 한잔 마시면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나에게 배고프니까 털보네 가서 밥 좀 사달라고 할 수 있을까?

친한 친구 중에 서른 아홉을 먹은 멘토 격의 친구가 있는데, 내가 열아홉 때 그가 서른 여덟이었고 조금 다른 의미에서 우리 둘 다 꿈나무(88년 생과 88학번)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루는 여의도에서 커피를 마시고 오들오들 떨면서 걸어가던 도중에 찬바람이 그의 머리에 무안한 일자 가르마를 남기며 지나갔다.
“너랑 나랑 나이 들어서도 계속 볼까? 나이 들면 네가 나한테 ‘김 영감님’이라고 할 때까지 말이야.”
“크하하. 영감님이라니, 영감님?”
“아니, 지금은 나랑 스무 살 차이 나지만 나이 들어봐, 늙어 죽는 건 다 똑같잖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빅 피쉬를 다시 봤는데 거기서 여자애가 이완 맥그리거한테 고백을 하면서 그러던데요. 10살하고 30살 차이는 많은 거죠? 응. 20살하고 40살은? 음, 조금. 그럼 60살하고 80살은?”

한 살이라도 더 많아 보이려는 오빠들에게 장담하는데, 호칭을 트게 되면 그 때부터 많은 ‘동생’들의 매력이 오색찬란한 빛으로 팡팡 터지며 관계의 재발견이 일어날 것이다. 한 번 살다 가는 인생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정관사 붙여 가며 따지기에는 그네들의 예쁜 이름들이 안타깝다. 네게 꽃이 되고 서로를 길들이며 살아가는 것만 해도 인생은 너무 짧지 않은가? 다른 점보다는 같은 점을 찾는 편이 훨씬 즐거운 일이란 것을 너도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 것에는 반색을 하면서, 정작 반말 쓰고 이름을 부르며 친구하고 싶다고 눈을 반짝이면 너와 나는 다르다며 정색을 한다. 이쯤 쓰고 있으려니 언어의 감옥 속에서 포효하는 옵빠옵빠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지은이 많이 컸네. 자, 다시 한 번 오빠라고 불러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