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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8 :: 네가 하는 말이니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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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4 :: 오빠라고 불러봐! (23)
2007-1 양석원 교수님
문화와예술의정신분석

학이 난다

- 영화『천년학』감상: 어긋나는 욕망들에 대해서 -


0620916 조지은


영화 『천년학』은 원작 소설인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를 충실하게 따라간다. 문어체의 대사들이 간혹 가다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이 영화는 장면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페이지를 넘기는 듯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중심 소재는 인물들이 품고 있는 ‘한’이며 다르게 말한다면 이뤄질 수 없는 욕망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천년학』의 인물들은 단지 무언가를 욕망하는 것을 떠나서 그에 얽매여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멍에를 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영화를 지배하는 이러한 충족될 수 없는 욕망과 근원 모를 설움은 인물들의 어긋난 시선을 통해서 표현된다. 송화와 동호, 송화를 짝사랑하는 용택, 그리고 동호의 몸을 붙드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마음은 얻지 못 하는 단심. 이 모든 인물들은 상대방을 끈질기게 응시하며, 그들의 욕망은 시선의 끝에서 다른 이의 어깨 너머에 가 닿는다. 단심의 눈물은 동호의 시선이 닿지 않는 땅에 떨어져 흔적도 남길 수가 없다. 누구도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다.

영화는 송화와 동호의 시선을 따라간다. 동호는 언제나 송화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가 다시 송화를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눈이 먼 뒤였다. 송화는 동호를 눈에 담지 않는다. 그녀는 목청으로 소리를 뽑는다. 송화는 동호의 눈빛을 느끼지 못 하고, 북소리로 그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뿐이다. 그럼에도 동호는 송화에게 자신을 전달하기 위해 송화의 소리에 장단을 맞추고 싶은 마음에 항상 소리 주변을 맴돌며 그녀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한다.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마주볼 수 있는 두 사람은 결코 맺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동호는 송화를 ‘바라보지만,’ 송화는 동호를 ‘듣기’ 때문이다.

『천년학』은 지리멸렬하며 시작도 끝도 맺을 수 없을 것처럼 모호하고 애처로운 삶들을 등불 삼아, 눈부시게 하얀 학 두 마리를 날리는 잔인하고 얄미운 영화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근원 모를 열망과 설움이 가득하다. 열망의 고리는 결국 아무 것도 담지 않는 송화의 눈 속에서 갈 곳을 잃어 이어지지 못 한 사슬로 남게 된다. 보지 못 하는 송화의 눈은 가장 깨끗하지만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애착도 지니지 않는다. 노인의 첩으로 들어가 살면서 노인이 임종하던 날, 송화는 자신의 앞날에 대한 한 점 불안의 기색도 없이 묻는다. “무엇을 부를까요?”라고. 가만히 잔을 내려놓는 송화의 표정은 되려 평안함이 묻어 나와 해탈한 비구니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는 이 모든 속세의 서툰 정열들을 가만히 질책하며, 물을 차는 듯 학이 날아오른다.


+ 진솔한 두줄 감상:
간사하게 실컷 약 올리고 학 날리다니
임권택 영화에는 학을 뗀다.
2007-1 나임윤경 성평등리더십의이해와실천

“네가 하는 말이니까.”

0620916 조지은


군대에 있는 애인이 내가 쓰는 단어들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함께 언어를 다듬는 작업을 할 시간이 없어지고 보니, 가끔 만날 때마다내가 쓰는 말들이 부담으로 느껴졌나 보다. 날것을 익혀서 충분히 몸으로 소화해내면 여러 가지 은유를 통해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는것이 가능한데, 나는 지금 날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기에도 벅차다. 일단은 내 언어를 만들어놓고 나중에 다듬어서 써야지, 라고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세상살이는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 만드는 것과 다듬는 작업이 분리될 수 없고 함께 평생을 가야 하는작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은근히 ‘아직 어리니까’라는 핑계로 번역을 유보해왔던 것이다. 더군다나 가까운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는단어를 풀기보다는 좀더 말을 많이 하게 되더라도 일단은 신경 안 쓰고 생각나는 것을 뱉어내는 타입인지라, 문어체가 섞인 말들을의도치 않게 많이 섞어 쓴 모양이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현학적으로 비춰지는 것은 끔찍하다. 속상하다. 그 뒤로 “나 이제 3일동안은 -ism에 관련된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겠으!”라고 다짐했지만 웬 걸, 채 이틀도 가지 않아서 버럭 화를 낼 일이 생기고말았다.

영상콘텐츠 관련하여 기획서를 작성하는 수업시간이었다. 담당 과목 선생님께서 상업영화계의 PD로 맹활약하시고 계신분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강의는 상업적 마인드가 짙게 깔려 있어 나까지 긴장될 정도이다. 수업시간에 하는 이야기들도 주로 어떻게하면 영상을 멋지고 잘 팔리게 만들 것인가, 에 관련되어 있는데 미디어를 통한 소통이나 성찰과는 거리가 멀다. ‘문화번역’과는거리가 먼 것이다. 팀별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어느 팀에서 ‘동성애’를 소재로 선택했다고 한다. 겉보기에 자극적인 소재들만선택되는 것도 한국의 공중파에서 생산해내는 다큐멘터리의 시각과 하등 다를 바가 없어 보여 안타까웠지만, 접근할 때 시각을 어떻게취하느냐에 따라서 완전 다른 콘텐츠가 생산될 것이기 때문에 팀별 PT에 약간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이게 웬 걸.

“남자 넷인 조에서 왜 하필이면 레즈비언을 할 생각을 했어요?”
“저희가 다 게이라서요.”
‘설마 저게 농담?’
“아, 그게 아니라 게이하면 저희 좋다고 쫓아올까봐 무서워서요.”(웃음)

괄호 열고 웃음, 에 주목하시라. 이런 변이 다 있나. 아무리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지만 저 아득한 밑에서부터분노를 끌어올리는 말을 ‘농담’이랍시고 던져대는 폭력성에 치가 떨리는 것은 당연했다. 버럭 소리를 질러 놓고는 손을 부들거리면서공책에 한바닥을 휘갈겨 써서 비아냥대고 싶은 마음을 대신했다. 글씨체의 불안정한 선이 아직도 펼쳐보면 선명하다. 다큐멘터리를찍는 자의 자세가 저렇다니. ‘대상’을 원하면 자연 다큐를 찍으세요!! 어쩌고 저쩌고. 수업을 마치고 위당관에서 중도까지내려오는데 독수리약국에 가서도 흥분이 가라앉지를 않아서 목소리는 엄청 커지고 말투는 더 거칠어지고 손은 좌우에서 허둥댔다. 전에이처럼 화가 난 적이 한 번 있었는데, 그 때와 마찬가지로 밤에 집에 오니 그 기운이 내 안으로 뻗치기 시작했다. 사람에 대한실망에, 과연 공존이라는 게 가능한지, 내가 이런 세상에서 정말 행복하게 살 수는 있는 건지 온갖 것에 대한 회의감이 자정을틈타 물밀 듯이 들어왔다. 과제고 뭐고 집중이 안 되어서 다 제쳐놓고 누워서 생각만 하다가 자버렸다.

그런데 하루 정도가 지나고 나자 또 화를 냈군, 이라는 생각과 함께 내가 뭘 한 거지, 라는 속상한 마음이슬며시 고개를 쳐들더니 이내 내 기운을 빼앗아버렸다. 내가 화를 내면 일절 소통의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건데. 그러면 저사람들에게 ‘또라이,’ ‘왜 저래?’라는 인상 말고 다른 무언가를 줄 수 있을까?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게 아니잖아. 내가그들에게 뭔가 할 수 있을까? 뭔가 나눌 수 있을까? 가깝게 느껴지는 사람이 하는 얘기가 교수님 한 마디보다 더 절절하게 와닿는법인데, 화를 내지 말고 다른 지점에서 인연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정말 뭔가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에 더 많은 말들이필요한 건데 이런 식으로 화를 내고 돌아서는 건 너무 멍청하잖아, 유연하지도 못 하고.

나임은 조금 다른 뜻으로 해석했지만, 내 생각에 조한이 말한 ‘공략하기보다 낙후시켜라’는 적의 언어를 배우는것이다. (‘적’은 비유적인 의미로 읽자, 누구든 단 한 사람에 대해서조차 적과 아군으로 딱 가를 수는 없으니까.) 누군가물었을 때 부모양성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친절하게 설명해줘야지, 이쪽에서 ‘너 그거 몰랐어?’라고 말해봤자 아쉬운 건이쪽이다. 낙후시키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정작 소리치는 쪽은 이쪽이고 안 들어도 세상 편하게 사는 쪽은 저쪽인데, 왜이쪽에서 언어를 다듬지 않는 건지? 그건 똑똑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촌스럽고 거친 사람이라서 아직 화를내는 수준에서밖에 대응할 수 없는 거라고 자책한다.

이런 생각이 나 스스로에게 꽤 상처를 내고 있었던 건지, 갈수록 화가 안으로 뻗어서 실망할 일이 많아진다.감정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게 아니니까, 서로 모순되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지난 일주일 정도를이러한 고민 때문에 몸까지 아파 와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해? 화를 내면 소통이 차단되고이미 내가 그 사람에게 ‘또라이’가 되잖아. 그럼 참따랗게 말하고 싶은 바가 전달되지 않잖아. 내 화풀이 하는 것 밖에 더 해?…….” 더듬거리며 말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는데, 잘 들어주고 진지하게 답변해준 고마운 인연들, 화를 내는 것 자체도 소통의 한방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지인들에게 고민을 이야기하면 동생은 함께 만화책을 빌리러 가자고 하고, 친구는 밥 먹자고 하고, 엄마는 쇼핑하러가자고 한다. 누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고 사진도 보여주고 아니면 촉촉한 눈으로 내 속까지 꿰뚫어보는 것처럼 날 지그시응시하는 것으로 천 마디 말을 대신하기도 한다.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를 위로하는 것이다. 또 누군가는 걱정된나머지 나에게 오히려 큰소리로 화를 내기도 한다. 그것도 한 방식이다. 화가 나서 낼 수밖에 없다면 화를 내야 하는 것 아닌가?뭐 당연한 것을 이야기하느냐고 누군가 말한다면, 단순히 아는 것과 맥락 속에서 재발견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에 지금 나에게는 항상전에 알던 것도 새롭고 소중하게 읽힌다고 대답하고 싶다. S가 내게 이런 말을 해줬다.

‘화가 나면 화를 내. 그 시기를 살아봐야 전환이 올 수도 있지. 머리로만 안 되는 건데 널 자책하면 생채기만나지 않니? 또라이라고 보일까봐 걱정이 되면, 정말 화끈하게 또라이가 되어 봐. 막 화도 내고.’ 한결 마음이 누그러진 것같다.

그래도 여전히 세련된 언어에 대한 열망 같은 것이 단단하게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는 하다. 왜냐하면 그것이‘번역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을 그렇게 의식하는 사람은 드물지라도, 모든 사람은 ‘문화번역자’다. 나도 한국어번역을 한다. 화를 내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설명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 설명을 하는 것은 좋은 말을 들었구나,이상으로 그에게 영향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잔상이 남지 않는다는 말이다. 반면에 은유와 일상어가 지닌 힘은 다른 어떤말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솔직하다. 나름대로 화도 여러 방식으로 번역해보면, 얼굴 찌푸리지 않고 또 다른 인연의 시작이 되도록잘 내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자, 지은아 머리도 좀 굴리고 말도 계속 해보자. 적으로 마구 몰아붙이지만 않는다면 화내는 것도좋다. 그럼 누군가는 이렇게 말해주겠지? “네가 하는 말이니까 생각해볼게.”
2007-1 성평등리더십의이해와실천

여휴가 왜 따로 있냐고요?

0620916 조지은

이번 쪽글 주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공학의 공학성에 대한 이야기일까? 공학이라고 하지만 실은 공학답지 못한 부분, 생물학적 성이 다른 한 쪽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공학의 시스템에 대한 성찰의 부재, 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 이 글에서는 가만히 오래 전부터 내가 고민하던 질문 하나를 던져본다.

난 ‘여학생 휴게실’의 열렬한 팬. 그런데 여휴가 왜 따로 있을까?

나는 ‘아싸’다. 아싸는 ‘아웃사이더’의 준말로 특정 집단에서 활동하지 않고 겉도는 사람을 일컫는다. 대부분 이럴 경우에는 그 집단에서 나와버리면 되기 때문에 이런 단어가 생겨날 틈이 없다. 그런데도 쓰이고 있는 ‘아싸’는, 나올 수도 없고 애초에 선택의 자유도 없는 ‘반’과 관련한 단어로 많이 사용한다. 작년 3월 한달 동안 ‘새내기’로서 그 많은 밥을 얻어먹으며, 나름대로 반 분위기에 적응하기 위해서 애써 보았지만 몇 가지 사건들이 있은 후에 결국은 박차고 나와버렸다. (그러고 보니 나 같은 아이들을 ‘먹튀’라고 부른다는 새로운 사실도 얼마 전에 알았다)

술자리에서 오가는 쓸 데 없는 이야기들, 1학년 여자 후배를 앉혀놓고 재미있다고 하는 성적인 발언들(우리가 그거 다 모르는 줄 알겠지?), 맞장구를 치고 같이 웃는 다른 선배들. 그 안에서도 ‘선배, 이러면 안 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분명 있기는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참자고 말하기 전에, 내가 왜 참아야 하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언제쯤이면 이 참는 것이 끝난다는 말인가? 나 못 참아. 눈 똑바로 뜨고 생각해보자. 어느 감독님의 스튜디오 이름처럼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박차고 나오니 캠퍼스의 전경이 그제서야 아름답더라, 하하하. 반에서 나오고 나니 불편한 점이 딱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학생회와 관련된 내용이 모두 반을 통해서 전달되기 때문에 아싸인 경우에는 접근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공강시간에 묵을 공간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여학생 휴게실을 들락날락했던 것 같다. 우리 학교에는 건물마다 잘 찾아보면 숨겨진 ‘여학생 휴게실’이 있다. 그 안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누워서 자기도 하고 구두를 벗고 발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잡지를 넘겨보기도 한다. 아, 좋다. 좋구나! “근데 왜 남학생 휴게실은 없는 거지?”

난 ‘여학생 휴게실’의 열렬한 팬. 여휴가 왜 따로 있을까?

밤에 집에 가는 길이었다. 한참 이런 저런 일들로 마음이 심난해서 이유 없이 방구석에만 처박혀 두문불출하던 시기였다. 집밖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는 오로지 아르바이트 하나였는데, 돈 때문에 머리채 잡혀 끌려나가는 기분에 항상 가슴 한 켠이 답답했다. 물 한 모금을 마셔도 별 나쁜 생각이 다 들던 때다. 홍대에 있는 카페에서 서빙을 했다. 알바가 끝나고 걷다가 담배를 한 대 태웠다. 지하철을 탔다. 취한 사람들로 공기가 온통 꼬여서 빌빌거렸다. 이런 시각이면 항상 좀더 일찍 내려서 버스로 갈아탄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아무 생각 없이 담배를 꺼내 드는데 순간 주춤했다. 그 시선들.

우리 집은 아주 평범한 주택가에 있다. 작은 시장이 하나 있고, 그곳을 통해 들어가면 지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아파트 단지가 있다. 우리 가족은 그 무수한 칸들 중 한 칸을 차지하고 산다. 집 주변에는 학원이나 슈퍼마켓, 동물병원, 세탁소, 운동화 빨래방 등이 있고 여대가 있는 쪽으로 가면 조금 번화한 거리가 나온다. 그러나 이곳은 홍대가 아니었지. 나는 결국 그 담배를 다 태우지 못 했다. 정류장에서 젊은 청년 하나와 아저씨 두 명이 담배를 태우면서도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뭐, 어쩌라고? … 어느새 나는 얌전하게 주머니에 라이터를 도로 넣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걷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렸다. 아무도 없는 집 앞 놀이터에 와서 혼자 씩씩거리며 한 대를 열심히 다 태우고 초라하게 들어갔다. 그 시선들. 내가 남자라면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난 ‘여학생 휴게실’의 열렬한 팬. 여휴가 왜 따로 있을까?

이미 나는 이 질문에 대답했다. 포인트를 찾아보시라!

‘아싸’나 ‘먹튀’와 같은 단어들이 어떻게 해서 쓰일 수 있게 된 것인지 하나씩 짚어 들어가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나는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보니, 아주 전형적인 아싸와 먹튀가 되어있었다. 1년 전에 ‘여학생 휴게실’이라고 선명하게 새겨진 글씨를 보면서 ‘도대체 이 학교가 어떤 학교이길래 이런 것이 따로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여학생 휴게실’이 따로 없는 학교가 이상하다. ‘도대체 이 학교가 어떤 학교이길래 이런 것이 따로 없단 말인가?’ 초등학교에서 배웠던, 말 그대로 불필요한 것은 치우고 필요한 것은 갖춰야 한다는 상식을 우리는 아직도 배운다. 간밤에 알림장을 펼쳐놓고 준비물 챙기던 만큼만 생각해본다면야 좋겠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총학생회장은 도대체 어느 초등학교를 나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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