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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9 :: 왜?그게 뭔데? (17)
2007-1 김선영 교수님
현대철학의문제

프로이트 아저씨의 겸손하게 살기 강좌

0620916 조지은

카프카는 죽기 전에 자신의 저작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친구에게 말했다. 그러나 고맙게도 카프카의 말을 듣지 않고 원고를 살려준 그 친구 덕택에 우리는 지금 “너도 카프카 좋아하니?”라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책을 태워달라고 한 건 카프카가 아니라 프로이트였어야 하는 건데.” 그러게 말이다. 프로이트 아저씨는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생각날 때마다 쓰고, 밥 먹다 쓰고 꿈꾸다 쓰고 진찰하다 쓰고 삐쳐서 쓰고, 쓰고 또 쓰고, 그렇게 해서 엄청난 양의 저작을 남겼다. 이후에 멋쟁이 제자인 라캉은 저작을 단 두 권 밖에 남기지 않았지만 “글자가 살해한다”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 등 도저히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프로이트가 읽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프로이트 아저씨는 소설을 쓰고 계셨다. 영감을 받으면 벌떡 일어나서 쓰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글은 재미있으나 읽고 나면 중언부언한 것들이 많아서 겹치거나 정리되지 않고 께름칙하게 남는 부분이 많다.

프로이트가 글을 썼던 방식처럼 그의 글을 읽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께름칙하게? 정신 바짝 차리고 정독하며 ‘밑줄 쫙, 돼지꼬리 땡땡!’ 하면서 읽을 수는 없는 텍스트다. 그가 서술하는 것들의 전제가 되는 내용들, 스스로 과학자라고 생각하며 정교한 설명을 하기 위해 수정했던 이론의 이음새 등을 기억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특기할 만한 점 중에서는 무의식, 의식이 분열되어 있다는 정신분석학의 뿌리가 되는 발상과 후기의 자아, 이드, 초자아론이 있다. 이 양쪽은 프로이트 이후에 정신분석학파의 발전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안나 프로이트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자아심리학파는 자아, 이드, 초자아론을 그의 최종 이론으로 받아들여 임상 케이스에서 자아를 강화하기 위한 치료를 한다. 대상관계의 멜라니 클라인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정신분석학파 역시 프로이트의 후기 이론을 확장하는 연장선에 있다. “프로이트에게 돌아가자!”고 외쳤던 프랑스 정신분석학의 라캉은, 우리가 프로이트에게 주목할 점이 의식-무의식의 분열에 대한 그의 통찰이라고 보았다.

이 중 내가 프로이트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 내부의 ‘분열’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중언부언한 프로이트 아저씨의 다른 이론들은 모두 차치하더라도, 그 모든 이론의 뿌리가 ‘무의식’이라는 개념에 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용기 있는 발언을 했던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어느 교과서에나 적혀 있는 ‘인간은 존엄하다’는 말, 신에게서 권리를 부여 받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을 과감하게 깨트렸다. 종종 ‘운명’이라고도 표현되는 것들의 밑에는 거대한 ‘무의식’의 뿌리가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을 알기 전까지는 결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다 알았다고 말 할 수 없다고 말이다. 이러한 무의식은 본능이 득시글대는, 언제든지 의식을 삼켜버릴 수 있는 검은 그림자처럼 묘사된다.

이러한 무의식이 생기는 것은 인간이 ‘억압’을 하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서 억압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이는 태어나서 좋아하는 것만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쾌락들 중에서 도덕적, 사회적으로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은 무의식에 가라앉는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를 시작으로 한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유아기가 그의 전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또한 신경학자였던 프로이트는 환자가 뇌의 특정 부분을 자극받았을 때 아주 사소한 부분이더라도 과거의 한 장면을 눈 앞에서 생생하게 재현하듯 기억하고 그 때의 감정을 똑같이 느낄 수 있다는 것 역시 이러한 무의식론의 연장선 상에서 설명한다. 여기서 전의식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 때문에 억압은 1차 억압과 2차 억압으로 나눠진다.

초기에 의식-무의식의 분열성과 대립성에 주목하면서, 강렬하게 금지된 욕망이나 도덕적이지 못한 것들을 무의식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완전한 억압의 1차 억압을 가리킨다. 2차 억압은 의식과 전의식 사이에 있는 검열 체계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은 지금 당장 의식이 주목하지 않는 부분이더라도 언제든지 기억을 끌어올 수 있는 어느 정도 허용되는 것들이다. 의식은 특정 부분만을 비추고 자극을 끊임 없이 받아들이지만, 의식의 영역에서 벗어난 내용들은 곧바로 전의식으로 내려가고, 만일 이것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욕망이거나 고통일 경우에는 무의식으로 억압된다.

프로이트는 위상학적으로나 지형학적으로 무의식에 대해 여러 가지 방식의 묘사를 시도하면서 그의 이론을 조금씩 발전시켜 나간다. 인간들이 대륙에서 지금처럼 판을 치고 살아도 아직까지 들어가지 못 하는 수심의 해저가 있다. 그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땅 위에서 밥을 먹고 친구를 만나며 걸어다닌다. 그러다 땅이 쩍 갈라지고 마그마가 솟아오르면 대재앙 앞에서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의식에는 의식과 다르게 시간도 없고, 현실적이지도 않으며, 쾌락원칙의 지배를 받아 이루고 싶은 각종 소망과 본능 욕구들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다. 무의식은 의식으로는 전혀 인식할 수 없으며 종종 은폐기억을 사용하여 자신의 모습을 감추거나 변장하기도 하지만, 상징적인 기호나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시간성, 쾌락원칙, 타자성, 역동성, 회귀성, 변장성, 비현실성, 비인과성, 비논리성, 기호성, 은폐와 망각 등의 개념이다. 단어만 보아도 부정적인 뉘앙스의 접두사가 가득하다.

“넌 프로이트가 과학이라고 생각하냐?”

같이 강의를 듣는 해멍과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웬만하면 평생 필요한 기본 지식은 다 익히는 중학교 때 과학의 정의에 대해서 배웠던 것이 생각나는데, 그에 따르면 과학은 변수를 통제해서 사물의 원리를 도출해내는 것이었다. 액기스만 뽑아내는 것 말이다. 프로이트는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우기는 부분들이 많아서 과학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교과서적인 ‘과학’의 개념을 현실에 적용하다 보면 그것이 가진 본래의 의의를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닌가?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실증적인 정신 자체만을 과학으로 보면서 어느 정도는 과학에 대한 기준을 조금 더 열어두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프로이트가 말했던 ‘무의식’에 대한 담론 자체가 전통철학에서 생각하던 ‘과학’의 패러다임을 흔드는 것이라서 더 혼란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임상 케이스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하여 생각하고 기록하고 원리를 도출해냈던 프로이트는, 그것에 대해 분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방법론을 차치하더라도 정신만큼은 과학자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처음으로 정신분석학 책을 펴든 것이 작년 겨울이니, 반 년 정도를 어설프게나마 프로이트나 라캉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 같다. 원래 목적은 자기분석이었다. 다른 것은 다 모르겠으나 내 안에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부분,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 때문에 ‘무의식’이나 ‘분열’이라는 말에 끌려서 정신 없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희망적인 말들이나 희망을 강요하는 언어보다 그쪽이 내게는 훨씬 더 정직하게 느껴졌다. ‘아, 정신분석학에서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보려고 하는 거구나.’ 아직도 프로이트가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만, 과학자로서 꼬장꼬장한 자존심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모두의 거부감과 비웃음을 감내했던 점은 후대인에게 칭찬받을 만하다.

‘무의식’의 개념이 가장 나에게 어필하는 점은 시간의 비선형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요즘도 그렇지만 갈수록 사람들은 나이를 먹는 것이 일정한 단계를 거치고 더 나아지는 것이고, 과거의 모습은 추억으로 간직할 줄 아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현인들은 그 최종점에 이르러서 화도 안 내고 화장실도 안 가는 완전무결한 신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대학에 갔어도 나는 아직도 엄마와 반찬문제로 씨름을 하고, 막냇동생 혼자 먹을 간식거리를 갖고 방으로 쏙 들어가면 금방 삐친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 곳에서 다른 경험을 할 수록, 내 안의 시간은 변태해서 새로 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차곡차곡 쌓이면서 범위를 좀더 넓혀 가는 느낌이 든다.

지인들 중에 꿈-분석이나 타로카드를 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무의식론이 지금 얼마나 대중적인지 놀랄 정도이다. 프로이트가 보면 “팔아먹으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라고 소리를 칠지도 모르겠다. 우연찮게도 이 수업과 함께 정신분석 수업을 듣고 있어서 이번 반 학기는 프로이트와 코를 맞대고 보낸 듯한 기분이 든다. 허무주의에 찌들어서 ‘인간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라는 정신분석의 언어에 귀가 솔깃했었는데, 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한동안 들이파다 보니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인간은 그렇게 밖에 살 수 없겠군. 그러나 플러스 알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겨우 이만큼 온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나마 솔직하다.
계속해서 묻기는 했지만 정작 자신은 답하지 않았으니까.
플라톤이 개념의 위계를 갖고 답을 찾기 시작한 것이
소크라테스를 극복한 것, 그에서 진보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모든 여인을 악처로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그 허허노인은 결국 묻기만 했지, 답을 제시하지는 않았잖아.
모르는 게 답일 수도 있는 건데, 답이 없을 수도 있는 건데.
그러니까 그 허허노인이 더 솔직한 것일지도 몰라.
보편적 원리, 정의 운운하며 한평생 사람들에게 묻고 다녔어도
결국 그런 게 있을 리 없으니까. 사람들은 그 때문에 당황하고.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묻는 것 밖에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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