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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 매체와 예술
유봉근 교수님

미술관, 지금처럼 해서 되겠습니까?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에 대한 소고


사회과학계열 조지은

1. 서론

“예술이 병들었을 때, 공식적인 예술과 제도는 미술관/박물관을 증축으로 그것을 치유하려 든다. 따라서 미술관/박물관이야말로 공식적인 예술과 제도의 배려이자 선물이다.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고 욕망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이 배려의 메커니즘은, 다른 은밀한 목적을 위해 모두를 현혹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는 집단의 전략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배려의 급수가 높은 사회일수록 상징이 손상되고 논리가 파산되었으며, 부조리와 불안과 권태가 만연한 사회이다.” - 장 보드리야르

박물관/미술관1)은 꼭 있어야 하는 겁니까, 예? 라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스타니제프스키는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에서 줄곧 우리가 현재 ‘미술’이라고 정의하는 것들이 모두 근대를 거쳐서 발명되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근대 이전의 모든 미술품을 ‘미술이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박물관’은 특히나 근대에 예술이 자율적인 영역으로 분리되어 스스로의 의미를 형성하는 것과 더불어 계획된 제도라고 한다. 실제로 ‘박물관’은 서구의 근대화 프로젝트 중 하나로 학교, 지역, 행정시스템과 더불어서 잘 맞물려 돌아가게 짜여졌다.

박물관은 그 자체가 미술품에서 전후맥락을 다 제거하고 그것을 개별적으로 떼어내 미학적 차원에서 감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기에 있을 수 있는 제도이다. 르네상스 이후에 예술을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으로 보는 사상과, 국가에서 대중에게 문화민주주의를 전파하겠다는 계몽주의적 사상에 힘입어 박물관은 탄생할 수 있었다. 스타니제프스키는 구조주의적으로 파고 들어가 현대미술사를 다시 쓰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미술을 전부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시각이 근대적 주체의 관점에서 상당히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는 수준에서 논의를 끝냄으로써 미술사 개론서 이상으로 논의를 진전시키지는 못 하고 있다. 그것이 본래 이 책의 목적인 동시에 한계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 점에 착안하여 나는 여기서 미술관 제도에 대해 좀 더 면밀히 고찰해보려 한다. 미술관의 사회적, 미학적 의의에 대해서는 글의 한계 상 생략하고 미술관의 대안 모색에 대한 내용을 주로 한다. 소위 미술관의 ‘이념적 폐허화’에 관한 의견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말하고자 한다. 웅장하고 화려한 facade의 미술관을 소위 ‘무덤’이라고 부르는 의견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 이유는 절망적인 의견을 반복함으로써 허무주의를 추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길이에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스타니제프스키가 말하고 있는 ‘포스트모던 미술관’의 허점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더 유익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술관 제도와 관련하여 아래 둘 중 한 권만 읽어도 가닥을 잡으실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는 개론서나 보충용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 심상용 저, <그림이 없는 미술관>, 2000:서울, 이룸
- 이인범 저, <미술관 제도 연구>, 1998:서울,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미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미술과 미술이 아닌 것, 그리고 그 외의 사물들이 어떻게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되는가에 대한 연구'를 담았다. 우리가 갖고 있었던 미술에 대한 고정관념의 전복을 시도하는 책으로, 미국의 미술사가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가 집필했다. 1997년 출간된 를 새로 편집하고 칼라 도판을 추가한 개정판.
'메리 앤 스타니제프스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2006:서울, 현실문화연구'의 내용을 토대로 근대적 박물관에 대해 짧게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본래 미완성의 문단들이지만 혹시나 유용할까 해서 올립니다.


근대적 박물관의 탄생

본래 서구문명사에서 대학과 교회, 귀족계급은 지속적으로 그림이나 물건들을 수집해왔으나, 이것들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현대의 박물관 수집품들과는 매우 다른 형태의 것들이었다. 가령 17세기 프라하의 루돌프 2세는 ‘미술의 방’에 맘모스의 상아, 화석, 조개, 거울, 렌즈, 터키 및 헝가리의 말 재갈, 알브레히트 뒤러 와 피테르 브뢰헬 1세의 풍경화 등을 모아 놓았다. 심지어는 ‘하늘에서 헝가리의 폐하 진지로 기적적으로 떨어진 고운 베일’도 들어있었다. 한 마디로 신기한 것은 다 모아 놓은 셈이다. 수집활동은 단순히 보는 여가 생활에 불과하였으며, 귀족들의 사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의 ‘박물관’의 기초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확립되었다. 1820년경 왕후귀족의 컬렉션은 공공의 박물관으로 이행되었다. 미술관이 출현하는 시기와 자율적 영역으로서 예술개념이 성립된 시기 또한 일치하는데, 이 부분은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박물관이 공공의 문화적 시설로 모양새를 갖추면서 ‘공들여 지어진 상징적 건물, 개별적으로 떨어져 있으면서 전시가 가능한 크기의 작품을 그 안에 담고 있을 것’ 등의 조건들이 함께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뚜렷한 경계

일단 선을 긋고 나면 선을 기준으로 공간에 안팎이 생기게 마련이다. 박물관 역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엄격한 경계를 또렷이 하기 시작했다. 먼저, 작품들을 장엄한 박물관 건물 안에 전시할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되면서 일반적으로는 국가나 유파별, 시대별로 작품을 배열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분류법은 근대적 패러다임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국민국가는 18세기 이후에 등장하였기 때문에 국가별 작품 전시가 가능한 것이다.

또 다른 상황을 한 번 가정해 보자. 나는 서울시립미술관에 피카소 전을 보러 가게 되었고, 시대별로 배열된 그의 작품들을 초기작부터 말년의 작품까지 차례대로 걸어 다니면서 감상하였다. 이후에 박물관에서 나온 다음에 내가 하게 되는 생각은 ‘피카소의 작품은 어떠한 경향에서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특히 관심이 가는 작품은 어느 시기의 것’ 정도일 것이다. 작품에 이러한 작가주의적 접근을 하게 되면, 일단 내게 ‘피카소’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으며 시대적, 인종적 맥락과 분리된 차원에서 받아들여진다. 이처럼 작품을 유파별, 시대별로 배열해놓는 것 또한 인간을 ‘자유의지’를 지닌 근대적 주체로서 간주하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내 발로 걸어 다니는 데 내가 보는 것이 온전히 나의 시각만으로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니? 가능하다. 내 눈으로 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내 눈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미 나는 서울시립미술관이라는 별개의 전시 공간 안에서 큐레이터가 기획한 미술전을 보고 있으며 ‘세기의 거장 피카소’라는 홍보 문구를 머릿속에 박아 놓고 그의 작품들 앞에 서게 된다. 또한 대부분의 미술품들은 하얀 벽에 눈높이에 맞춰서 걸리게 되는데, 작품들이 이러한 형태로 전시된 것은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작품을 흰 벽에 걸어 놓음으로써 큐레이터는 미술품을 다른 세계와 분리시켜 날 것으로 우리 앞에 데려다 놓는다. 결국 감상자는 전시기획자가 만들어놓은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길을 걸으면서 그 순서대로 예술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미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미술과 미술이 아닌 것, 그리고 그 외의 사물들이 어떻게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되는가에 대한 연구'를 담았다. 우리가 갖고 있었던 미술에 대한 고정관념의 전복을 시도하는 책으로, 미국의 미술사가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가 집필했다. 1997년 출간된 를 새로 편집하고 칼라 도판을 추가한 개정판.
아도르노가 지적했듯이 현대의 예술은 철학과 상보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 오늘날의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작품의 빈약성과 철학의 풍성함을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늘날 비평은 작품 이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성립 자체에 참여한다. 과거에는 어떤 대상이 작품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기준이 작품 밖에 미리 존재했지만, 오늘날 예술은 자신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정의를 자기 안에 품고 나와야 한다. 뒤샹이 소변기로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이 새로운 예술의 정의다. 오늘날 예술에 '주제'라는 게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왜 예술인가'하는 것이리라. 이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 때문에 오늘날 예술은 비평에 결정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 때문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철학과 밀접한 공모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中
전시를 다닐 때마다 작가들의 코멘트를 보면 대개 너다섯 줄을 한 문장으로 써놔서 머리가 아팠다.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돌아나올 때에는 작품의 빈약성 때문에 항상 아리송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최근에 다녀온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Dual Realities'의 경우에는, 나오는 길에 불쾌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왜 기분이 나쁜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그런 언어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갈수록 언어를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을 느낀다. 그래서 유려한 문장보다는 거친 문장이 끌리고, 어려운 단어일수록 도발적으로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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