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예술이 병들었을 때, 공식적인 예술과 제도는 미술관/박물관을 증축으로 그것을 치유하려 든다. 따라서 미술관/박물관이야말로 공식적인 예술과 제도의 배려이자 선물이다.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고 욕망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이 배려의 메커니즘은, 다른 은밀한 목적을 위해 모두를 현혹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는 집단의 전략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배려의 급수가 높은 사회일수록 상징이 손상되고 논리가 파산되었으며, 부조리와 불안과 권태가 만연한 사회이다.” - 장 보드리야르
박물관/미술관1)은 꼭 있어야 하는 겁니까, 예? 라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스타니제프스키는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에서 줄곧 우리가 현재 ‘미술’이라고 정의하는 것들이 모두 근대를 거쳐서 발명되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근대 이전의 모든 미술품을 ‘미술이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박물관’은 특히나 근대에 예술이 자율적인 영역으로 분리되어 스스로의 의미를 형성하는 것과 더불어 계획된 제도라고 한다. 실제로 ‘박물관’은 서구의 근대화 프로젝트 중 하나로 학교, 지역, 행정시스템과 더불어서 잘 맞물려 돌아가게 짜여졌다.
박물관은 그 자체가 미술품에서 전후맥락을 다 제거하고 그것을 개별적으로 떼어내 미학적 차원에서 감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기에 있을 수 있는 제도이다. 르네상스 이후에 예술을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으로 보는 사상과, 국가에서 대중에게 문화민주주의를 전파하겠다는 계몽주의적 사상에 힘입어 박물관은 탄생할 수 있었다. 스타니제프스키는 구조주의적으로 파고 들어가 현대미술사를 다시 쓰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미술을 전부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시각이 근대적 주체의 관점에서 상당히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는 수준에서 논의를 끝냄으로써 미술사 개론서 이상으로 논의를 진전시키지는 못 하고 있다. 그것이 본래 이 책의 목적인 동시에 한계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 점에 착안하여 나는 여기서 미술관 제도에 대해 좀 더 면밀히 고찰해보려 한다. 미술관의 사회적, 미학적 의의에 대해서는 글의 한계 상 생략하고 미술관의 대안 모색에 대한 내용을 주로 한다. 소위 미술관의 ‘이념적 폐허화’에 관한 의견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말하고자 한다. 웅장하고 화려한 facade의 미술관을 소위 ‘무덤’이라고 부르는 의견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 이유는 절망적인 의견을 반복함으로써 허무주의를 추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길이에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스타니제프스키가 말하고 있는 ‘포스트모던 미술관’의 허점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더 유익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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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본론
뒤샹이 샘이라고 해도 변기는 변기다
미술관은 본래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귀족들의 컬렉션이 공공의 부문으로 이행한 것이 그 모태가 되었다. 진귀한 물건들을 수집하던 귀족들의 사치가 문화민주주의를 표방하여 박물관/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대중 앞에 선보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술관이 애초에 ‘컬렉션’을 모태로 한다는 점인데, 지금도 그것은 다르지 않다. 일단 미술관에 전시될 미술품은 미학적 가치를 인정받을 만큼의 평가가 있어야 하고 일정한 과정을 통해서 미술관까지 오게 된다. 그렇지만 누가 미술품의 ‘미학적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
1994년 한 독일 텔레비전 방송국의 ‘몰래 카메라’ 프로그램은 두 마리의 침팬지가 마구 그린 유화 몇 점을 함부르크의 한 전시회에 슬쩍 걸어놓았다. 프로그램 제작자의 예상은 적중했다. 함부르크 미술관장을 비롯하여 많은 수의 저명한 예술 전문가들이 침팬지의 그림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 것이다.
“나는 이 그림들에서 젊음의 신선함과 패기,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이 그림의 작가는 최소한의 도구와 4가지 색만으로 작업하고 있다. …… 대칭을 맞추기 위해 빨간색을 사용했다. 완벽하다.”
제도로서 미술관이 저지르는 혐의는 여기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결국은 그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미술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의 여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조지 딕키는 미술 제도의 이러한 권력에 대하여 확신을 갖고 비판한다. “그림이 예술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준거는 전적으로 그것이 놓이는 장소에 달려 있다. …… 시카고의 ‘자연사박물관’에서는 예술일 수 없는 것들이 ‘시카고 미술관’에서는 예술작품으로 간주된다.”2)
현대의 모든 예술작품들이 품고 있는 질문이 ‘이것이 예술인가’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살펴볼 때, 미술관이 제도로서 미술 자체를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현대 미술은 그 자체로 안에 철학을 담고 나와야 생명력을 얻기 때문에 곧장 비평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되는데3), 여기서 역설은 더욱 심화된다. 활자 매체에서 뉴미디어로 전지구적 기준에 대한 논의가 오가게 되고 나서, ‘이것은 미술이기 때문에 알려야 한다.’가 아니라 ‘이것은 미술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그렇다.’라는 명제가 통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맛있는 초콜릿을 먹는 것이 아니라, ‘맛있다고 선전이 된’ 초콜릿을 먹는다.
포스트모던 미술관의 키워드는 ‘소통’
더욱 절망적인 것은 미술이 너무나도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려 관광거리 이상의 장소로서 미술관이 기능하지 못 하고 있다는 점이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하루에도 엄청난 인파들이 몰려들지만, 그들은 ‘와서 잠깐 보고 가는’ 관광객들이며 많은 미술관들이 이러한 관광객들을 위하여 카페를 열고 쇼핑공간을 만든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에서 스타니제프스키는 이렇게 미술관이 변화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미술관’으로서 진화해간다고 이야기한다.
“1980년대 포스트모던 미술관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미술작품을 보고 감상하는 방식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술관들은 더 이상 칼 프리드리히 싱켈의 구박물관과 같이 미학적 걸작들의 진열과 감상만을 위한 시설들이 아니었다. (중략) 박물관에 가는 기회가 있으면 미술을 감상하는 시간과 먹고, 쇼핑하고, 읽고, 사교활동을 하는 시간을 한번 비교해 보자.”4)
결국 이것은 미술관이 관객과 소통을 잘 하고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콧대 높은 근대의 미술관이 소통의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포스트모던 미술관의 핵심 과제가 관객과의 소통으로 떠오른 것이다.5) 미술에 대해서 작가와 작품, 혹은 작가와 미술관을 연관 지어 설명하려는 관계사적인 관점에서 수용미술의 입장이 더욱 강화된 것도 한 몫 하였다. 이것은 현대에 들어서 교통수단의 발달로 관광산업이 유례없이 빛을 보고 있으며, 박물관/미술관이 그 중심에 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스타니제프스키의 위와 같은 발언은 관광객을 확보하여 돈을 벌려는 미술관의 ‘꼼수’가 미술관 방문자 수를 늘렸다는 점에 대해 저자가 지나치게 낙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많은 방문자 수가 곧 미술관과 관객 사이의 소통이 증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소수의 엘리트들만 출입이 가능했던 루브르 박물관이 지금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더불어 관광객들을 위한 공간과 이벤트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지만, 대거 관광객들이 주 단골손님이 된 상황에서 ‘한 번 왔다 가는’ 이들과 소통이 증진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쇼핑하기 좋으면 포스트모던 미술관인가
미술관의 전시는 크게 기획전시와 상설전시로 구성된다는 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상설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천경자전을 열듯이, 미술관이 자체 소장한 미술품을 전시하는 것이다. 상설전시에서는 기획전시에서 드러나지 않는 미술관의 목표와 미학적 이념, 개성 등이 드러나서 매우 중요하다. 반면 기획전시는 그때그때 기획자에 의하여 이뤄지는데, 보통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은 이벤트의 성격을 지닌 기획전시를 찾는 경우가 많다. 관광객일수록 기획전시를 찾는 경우가 많음은 물론이다.
미술관은 상설전시를 중심으로 하여 고유한 성격을 확보하고 미술품에 대한 꾸준한 연구를 진행하여 지역사회에 또한 문화적으로 기여해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장기적으로 관객들과의 소통을 증진시키기 위한 연구가 진행될 수 있고, 또 그에 대하여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술관이 단순히 관광객들에게 의존하게 되면 기획 전시를 중심으로 운영이 되고, 그에 따라서 소통을 증진시키려는 노력보다는 좀 더 많은 표를 팔려는 쪽으로 스탭들이 움직이게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미술관은 단순한 관광명소 이상으로서 기능을 하기가 어렵고, 미술전시공간을 자체적으로 꾸리는 분위기 좋은 카페와 비교하였을 때 굳이 돈 들여서 미술관을 유지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스타니제프스키가 최근 메트로폴리탄에 일고 있는 변화를 가리켜서 포스트모던 미술관으로 진화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술관의 핵심인 미술품과 전시기획, 스탭에 대한 언급 없이 단순히 관광객의 시각에서 ‘소비하기 편해진’ 공간을 포스트모던 미술관이라고 부르는 것이나 다름없이 때문이다.
전지구적 기준의 허구
또 다른 이유에서 나는 미술관들이 생존을 위해서 올바르게 진화하고 있다는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현대 미술관에서 초래하는 이념적 황폐화의 결정적 증거로 스미소니언 협회에서 1996년 심포지엄 ‘새 밀레니엄을 향한 박물관’에서 논하는 미술관 컬렉션의 분류체계에 대해 말하려 한다. 전지구화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수용자에 대한, (또 다시 화두로 떠오르는) ‘소통’을 배려하기 위해서 일괄적인 분류 체계를 갖추자는 것이 국제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전 세계적인 정보 교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세계적 기준을 불가피하게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6)
이보다 더한 퇴보가 어디 있겠는가? 온세상의 미술관이 똑같은 기준을 갖고 똑같은 생각을 하며, 전세계 사람들이 똑같이 분류된 작품들을 보면서 지구적인 동지애를 느낀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표준은 허구다. 누가 만드는 것이 표준이며, 어디에 맞추는 것이 표준인가? 표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숫자들을 들고 나와 많은 이들을 혼란스럽게 하는데, 출산률이 1.7명이라고 해서 아이를 1.7명 낳는 사람은 없다. 수치는 어디까지나 가상의 영역일 뿐, 현실에서 미학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며 문화적 다양성을 넓히기 위한 방법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3. 결론
“자유에 대한 열정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현실 앞에 서야 하고, 불가피하게 제도의 문제와 맞서야 한다”는 도므나크의 말을 떠올려 볼 때, 이래저래 미술관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제도이다. 미술관이 미술사에서 공헌한 바를 부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혼란보다도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부재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대안 없이 무조건 미술관을 쳐부수자는 단세포적 논의에 대해서는 오히려 더 화를 내야 할 것이다. ‘예술계artworld'를 벗어나서 예술품이 생산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예술계의 핵심에는 미술관이 있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를 통해 당연하게만 여겨왔던 미술관/박물관의 존재에 대해 파고 들어가면서, 그 뒤에 존재하고 있는 미학계의 권력 논의와 유통 문제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반가운 일이다. 스타니제프스키의 구조주의적 통찰은 예술계에서 미술관이 지니고 있는 근대적 존재 가치를 성찰하는 데에 탁월한 시각을 제공해준다. 또한 저자의 몇몇 주장에 대한 반론에서 시작하여 포스트모던 미술관이 지녀야할 특성에 대해 생각해본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아마 나는 대부분 감상자로서의 삶을 살겠지만, 그와 관련된 미디어를 생산하는 사람으로서 미술관 제도에 대한 고찰은 매우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4. 참고문헌
- 메리 앤 스타니제프스키, 박이소 역,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2006:서울, 현실문화연구,
- 심상용 저, <그림이 없는 미술관>, 2000:서울, 이룸
- 이인범 저, <미술관 제도 연구>, 1998:서울,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 진중권 저, <현대 미학 강의>, 2003:서울, 아트북스
5. 각주
1) 박물관은 museum의 한자어 번역이고 미술관은 art museum의 한자어 번역으로 모두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쓰던 단어를 그대로 들여온 것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두 번역어 사이의 차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앞으로 이 글에서 쓰는 ‘박물관’이란 용어는 미술계 박물관의 의미 범주 내에서 사용한다. 참고: 이인범 저, <미술관 제도 연구>, 1998:서울,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p.16-21
2) 심상용 저, <그림이 없는 미술관>, 2000:서울, 이룸, p.182-185
3) 진중권 저, <현대 미학 강의>, 2003:서울, 아트북스
4) 메리 앤 스타니제프스키, 박이소 역,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2006:서울, 현실문화연구, p.208
5) 이인범 저, <미술관 제도 연구>, 1998:서울,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p. 13 “W.Iser는 예술작품이 창작-작품-수용이라고 하는 유기적 연관에 따른 하나의 전달구조로서 사회성을 지니는 것”에서 발췌.
6) 심상용 저, <그림이 없는 미술관>, 2000:서울, 이룸, p.213
미술관 제도와 관련하여 아래 둘 중 한 권만 읽어도 가닥을 잡으실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는 개론서나 보충용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 심상용 저, <그림이 없는 미술관>, 2000:서울, 이룸
- 이인범 저, <미술관 제도 연구>, 1998:서울,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