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  말많은마리 0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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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석산 [한국의 정체성]

이 책, 말이 친절하며 지나치게 논의를 확대하지도 않고 딱 고만한 분량에 어울릴 만한 내용을 무리 없이 전개해 나가서 좋았다. 생각이 잔가지처럼 뻗어나갈라치면 재빨리 다른 질문을 던지면서 본론으로 돌아오도록 유도하는 대목이 몇 군데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이와 관련된 [한국의 주체성]을 주문하려다가 목차를 보고서는 조금 망설였다. 그리고 [한국의 정체성]리뷰가 궁금해서 클릭을 해봤다. ‘이안’이라는 사람이 탁석산이 제시하는 것들은 진부하며 대중성에 대해 그런 식으로 협소하게 사고하고 옹호하면 '다수의 폭력'에 대해서 뭐라 할 말이 없다는 글을 남겼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대중 파시즘이 아니지 않은가? ‘한국’이라는 집단의 정체성과 집단의 심리가 분명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에서 탁석산이 대중성을 들고 나오는 이유는 ‘한국’의 정체성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한국인’들과 별개인, 그 자체의 속성을 고찰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대중성은 하나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양식은 ‘한국인’들을 빼놓고 보더라도 법률, 언론, 교육, 건축, 예술 등 변화하는 인간의 가치체계에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정체성은 동일성을 인정받을 때에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성을 고찰하는 작업은 ‘한국’이라는 집단의 동일성을 확보하는 작업, 즉 정체성을 탐구하는 작업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러나 ‘이안’이 말하는 '다수의 폭력'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다. 대중의 파시즘이란 다수의 사람이 의도적으로 권력을 쥐고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대중의 기호가 매스 미디어나 이데올로기에 큰 영향을 받는 때에 대중이 갖는 파시즘적 속성 역시 대중성으로 인정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인가?

전자의 경우, 문화 부분을 고찰하는 데 대중성을 옹호한다고 하여서 그것이 곧장 대중의 파시즘과 다수의 횡포를 옹호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느 학급을 탐구한 결과 운동회 때만 되면 이 반이 옆반과 격렬한 경쟁에 돌입하여 몸싸움까지 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떤 이들은 욕을 하기도 하고 누구는 도발적인 문구를 옆반 벽에 적어놓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학급에서 개별자인 학생들이 표현하는 공격성을 근거로 학급 집단에 공격적(폭력적)인 성격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것이 학급 아이들이 다른 학급 아이들과 맞장 뜬다는 사실을 옹호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도덕적 판단은 별개의 문제이다. 탁석산이 말하는 대중성의 고찰은 어디까지나 정체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대중성을 하나의 요소로 간주한다는 것이지, 대중성 그 자체의 정당함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탁석산이 말하는 대중성 탐구는 주로 문화 예술 분야의 창작물을 분석해서 이뤄지기 때문에 아마 ‘이안’이 말하는 '다수의 폭력 옹호'란 의미상 후자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수의 폭력'이라는 용어만 보자면 다수의 주체성이 강조되어 전자를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중의 파시즘은 그런 의미에서 다수의 폭력보다는 좀더 넓은 뜻의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쪽에서 조금 더 자세하고 친절한 비판을 조목조목 해줬더라면 더 깊은 성찰이 가능했을 텐데, 그렇지 않아서 아쉽다.

애초에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흔히 사람들이 “한국인은 ~하다.”라는 데에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축구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식 집에서 정식을 먹다가 “나는 일식이 좋아. 스끼다시도 그렇고 회도 그렇고 일식은 대부분 마구 섞어놓지 않아서 하나하나 깔끔한 맛을 느낄 수 있잖아.”라는 내 말에 엄마가 대답하셨다. “너는 참 이상한 애다, 찌개 같은 거 안 좋아하고. 너는 한국 사람 아니냐?” “한국 사람이라고 다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 한국에 그런 음식이 흔할 뿐이지. 취향은 사람 수만큼 있는 거잖아.” 그래서 오래 전에 사두었던 이 책을 들었고,(이제 질문이 생겼으니 읽을 때가 되었군!) 시작 부분에서 합성의 오류와 분할의 오류를 통해 ‘한국’과 ‘한국인’을 뚜렷하게 구별하는 데에 상당한 비율의 페이지를 할애하는 저자에게 호감을 가졌다.

[한국의 정체성]에서 제시하는 정체성의 기준—고유성, 창의성—과 정체성 판단의 기준—현재성, 대중성, 주체성— 역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단어들이 왜 꾸준하게 제시되고 있는지 차근차근 짚어 보는 것에 이 책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책에서 제시되는 예들이 진부하다면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정 시간 동안 인정을 받음으로써 가장 간단하고 안전한 표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예들은 그 자체로서는 진부할지 모르겠지만, 잘 구성된 글의 일부분으로서 들어가게 될 경우, 전체적인 글의 콘텍스트가 물 흐르듯 흘러갈 수 있도록 이음새 역할을 해주며 다시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글 잘 쓴다.


+ 이하는 흔히 많은 글에서 대중성과 상업성을 혼용하는 경우를 봤기 때문에 인용해둔다.

대중성은 흔히 상업성과 동의어로 쓰인다. 대중성을 확보했다는 것은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는 것과 동의어처럼 쓰이고 있다. 하지만 양자는 물론 다른 개념이다. 좋은 품질과 저렴한 가격이 상업성의 요체라면 공감대를 자극하는 것이 대중성의 요체이다. 대중성과 상업성을 동일시하는 것은 대중을 얕보는 데에서 비롯된다. 대중이 좋아하는 것을 깔봄으로써 자신의 지적 우월감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의 정체성], 탁석산, 2000, 책세상, p.132

정체성

  탁자가 두 개밖에 없는 포장마차 가운데 한 탁자를 차지하고서 한 선배와 소주를3분의 2 넘게 마시고 있는데, 왁자지껄 새로운 손님 한 떼가 들어와 앉는다. 세 명은 평범해 보이는데 머리칼을 네모나게 깎아친나머지 한 놈은, 척 보니 깍두기다. 선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도란도란하고 있는데 남녀 한 쌍이 포장을 들치며 삐죽이 들어왔다가좌석이 없어서 나간다. 그러자 자기 앞의 술잔을 아가리에 털어 넣은 깍두기가 분명 우리보고 들으라고 씨부렁거린다. "술을 처먹었으면 빨리빨리 일어나야지 다른 사람 장사도 못하게 꾸무적거리고 있어." 딴에는 포장마차의 주인이 제 친구였거나 아니면 나와바리에 속했던 모양이다. 선배도 나도 서로 무안해서 얼굴도 못 쳐다보고 탁자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깍두기는 기고만장했다."술도 못 마시는 새끼들이 안주 하나 시켜 놓고 시간만 겐세이하고 있네." 이런 개자식이 있나. 욕을 하려면 인지가 되도록상대를 콕 찍어 해야지, 너 말고는 들어 줄 사람이 없는 곳에서 누구 들으라고 히야까시를 하나. 고개를 들어 놈을 똑바로 보며말했다. "야 씹새끼야, 너 깡패지." 불의의 기습을 당한 깍두기가 혀를 차며 앉은 자리를 기신기신 일어난다. 그러면서 일행을 향해 "나보고 깡패란다. 이때껏 살았어도 깡패라는 말 처음 들어본다." 정체성이란 뭔가?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것처럼 스스로 깨닫기까지는, 타인의 부름에 의해 규정되는 게 정체성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자신이 선생님인 줄 아는 까닭은 제자들이 나를 볼 때마다 "선생님, 선생님"하고 불러 주기 때문이고 사장이 사장인 것은 직원들이 "사장님, 사장님" 하고 따르기때문이다. 그런데 깡패에겐 아무도 "깡패님, 깡패님"하고 불러 주지 않는다. 그래서 깡패는 뒈질 때까지 자신이 깡패인 줄모른다. 그러니 얼마나 놀랐을 것인가. 갑자기 똥인지 된장인지 몰랐던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었으니, 깍두기는 마이를 벗었다.그리고 술병 박스에 든 빈 소주병을 들었다. 나는 의자에서 몸을 틀어 아예 놈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 1미터 지척에서 병이 날아왔다. 나는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그 병은 내 귓전을 스쳐 지난 다음 바닥에서 깨어졌다.두 번째 빈 병을 드는 것을 놈의 일행이 막았다. 그들은 참 유순했다. 누가 나를 불러 주기 전에는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 장정일, 『생각』 중에서

옛날에 몇 사람이 상제上帝에게 하소연하여 편안히 살기를 꾀하려고 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이 "저는 벼슬을 호사스럽게 하여 정승 판서의 귀한 자리를 얻고 싶습니다"라고 하니 상제가 "좋다. 그렇게 해주마" 라고 허락하였다.
두번째 사람이 "부자가 되어 수만 금金의 재산을 소유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니 상제가 "좋다. 네게도 그렇게 해주마"라고 대답하였다.
세번째 사람은 "문장과 아름다운 시로 한 세상을 빛내고 싶습니다"라고 하자 상제는 한참 있다가 "조금 어렵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주마" 라고 답을 하였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나와 이렇게 말했다.
"글은 이름 석자 쓸 줄 알고 재산은 의식衣食을 갖추고 살 만합니다. 다른 소원은 없고 오로지 임원林園에서 교양을 갖추며 달리 세상에 구하는 것 없이 한 평생을 마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자 상제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이렇게 답했다.
"이 혼탁한 세상에서 청복淸福을 누리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너는 함부로 그런 것을 달라고 하지 말라. 그 다음 소원을 말하면 들어주겠다."


서유구, <산수간에 집을 짓고>, 안대회 엮어옮김, 돌베개, 2005



cafe page의 게시판에서 읽고 한참을 웃다가 올려요.
내일 (1월 24일 수요일) 저녁 여덟 시에 <천 개의 공감> 북포럼이 카페페이지에서 열립니다.
분명 즐거운 일들이 가득하겠죠? 저도 마실 나갈 예정인데, 많은 분들 오셔서 이야기나누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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