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  말많은마리 070808
female macho 에 해당하는 글 : 2 개
2006/11/30 :: 제대로 묻기 (20)
일단, 나임 여성학 수업 시간 적은 것.
페미니즘은 B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주장 할 거면 이 수업은 왜 듣나? 그냥 주장하면 되지.
문제는 B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자기 안에서 A와 B를 화해시키고 곱씹어보는 거지.
내 안에 있는 B를 보고 A를 보고 다 보면 좋겠다는 것이지롱.
그래 결국은 다 자기화잖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그래, 맞아. 난 억압되고 있었어!’라는 식으로 계몽되지 말 것.
그게 뭐냐!!! 그럼 안 배운 것만 못 하다.

뭐 이런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서 돌고 있고 카페에서 해멍, 위드와 수다 한 판.

페미니즘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거의 나흘 가까이 계속 고민하고 있음.
해멍이 나에게 ‘가만 있는 사람에게 페미니즘이 무슨 권리로 넌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거냐? 정말 행복한 상태에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냐?’ 물음. 일단 나는 페미니즘에 의해서 계몽된 타입이 아니라 어찌어찌 공감하고 재미있는 글들을 읽다보니 자꾸만 페미니즘에 가 닿은 거지. 그래서 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 했고, 여성학 선생님에게 질문하지 못 함.

멍에게 다시 물었다. 뭘 물은 거냐?

그걸 모르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들, 정말 그 상황에서 자기 상황에서 페미니즘이고 뭐고 알 필요도 없이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권리가 있는 건가? 페미니즘이 무슨 권리로?

문제는, 그렇지 않은 이데올로기가 있나? 사방에서 자기가 옳다고 외쳐대는데.
결국은 관점의 문제가 아닌가? 관점 없이 대화할 수 있나? 그건 불가능한데.

근데 왜 페미니즘만 그렇게 반감을 사고 부각되는 걸까? 여기로 질문을 돌려볼래. 이게 맞는 질문 같다.

과도기라서 극단적인 경우로 어필하기 때문인가?
페미니즘, 이란 단어 자체가 반감을 사고 있다는 것은 결국 그 단어가 낡았다는 거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단어를 바꿔봤자 똑같이 낡은 거 아닌가?
그 단어가 반감을 사는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 뭐라고 부르든 결국 반감을 사면 마찬가지.
단어 바꿔봤자다. 그건 낡은 것이 아니다. 이미 누군가에게 반감을 주거나 호감을 사고 있지 않은가?

그게 반감을 사는 맥락은 아마도 페미니스트랍시고 활동하는 사람 중에서 female macho의 어법을
구사하는 이들 때문이지 않을까? 그리고 말이 되지 않는 말을 구사하기도 하니까. 근데 그들이 제일 활발해!!! 맨날 싸워.

그러니까 페미니스트 집단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 말을 들어주지 않았을 때 아쉬운 건 그쪽이라고.
그러면 그것을 위해서 언어를 좀 더 다듬는 작업을 해야 하지 않아? 선동하지 말고.
‘오히려’ 여자가 더 이해를 못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어폐다. 같은 맥락에서 ‘여성해방주의’도 말도 안 되는 번역. 네가 뭔데 날 해방시켜? 나에 대해서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 거냐? 네가 전제를 하든 말든 일단 말하고 싶으면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안 되지 않나?

그런 식은 어떤 식?

너는 잘못 살고 있다. 깨어나라. 이런 식의 또 다른 우월주의.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다수다. 그러니 인정하라. 이것은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말.
다수와 소수. 도대체 수준이 얼마나 천박하길래 백만 인 정도 서명을 트럭으로 갖다 대야 이슈가 되는 건가?
나 혼자, 단 한 명이 말을 해도 들어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 식으로 숫자에 목매게 되면 결국 무관심과 냉소만 사게 된다. 나는 한 명이지만, 내가 이렇게 느낀다, 나는 이게 정말 불편하고 싫다, 가만 살고 싶은데 자꾸 이렇게 해야한다는 말들이 들어온다, 그게 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일상어로 푸는 게 좋지. 그리고 그게 꼭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읽히냐? 아니란 말이다. 어쨌든 그냥 말을 하면 되는 거고, 굳이 페미니즘을 들이대지 않아도 된단 말이다. 게다가 페미니즘을 들이댔을 때 더 많은 담론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는 나의 생각은 바뀜.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이란 단어 자체는 콘크리트 벽 쌓는 거나 마찬가지. ‘그건 네가 하는 말이지, 현실은 다르다.’ 그렇지만 인정하기 싫어도 둘 다 현실이란 말이지.

페미니즘 용어의 어폐.
백 년 전에 feminine의 어원에서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쓰게 된 것은 좋다, 그래 그게 통했겠다.
여성의 시각에서 소수자 시각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미 여자들이 많아지지 않았나? 그걸 여성주의나 여성해방주의라고 말 할 수 있나?
이게 ‘오히려’ 여자들이 이해 못 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이유.
이 쪽에서는 그런 여자들이 있을지 몰라도 저쪽에서는 알파 걸들이 초국적 권력 위에 하이힐을 신고 다닌단 말이지.
그리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공감해달라고 끌어당기지 말란 말이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죄책감 갖게 하지 말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일다 인터뷰에서 여성만 다루는 것이 싫다. 그러면 딱 보기 싫은 사람은 안 보거든.

이렇게 낡은 것을 이야기할 수는 있겠다. 대자보 붙이고 열라 글씨를 써봤자 내 눈에 들어오는 건
그래서 어쩌라고? 뿐이잖아. 그러니까 영화제도 기획하고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는 여지를 여는 것 아닐까?
요즘 사회적 기업과 대안적 기업을 구분하는데, 그것은 어불성설. 기업은 어쨌든 기본이 이윤창출.
그게 아니라면 시민단체나 NGO 같은 것이겠지, 새로 용어를 만드는 것은 뭐지?
기획력이 있는 사람들은 기업에서 사회공헌 프로젝트도 하고 영화제도 하고 축제도 열고 전시도 하고
그런 식으로 다양하게 접근한단 말이지. 그런데 낡은 방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선언문을 쓰고 있고.
뭔가 하고 싶다는 것은 알겠으나 이미 보기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인 세상인데. 어필해야 하잖아.
기업이고 시민단체고 그런 구분보다는 결국 기획력 있는 사람들은 자본과 함께 위에 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은 기업으로 간다. 왜? 돈이 있으니까. 그리고 더 잘 할 수 있으니까.

해석의 문제.
뭐야 난 안 그래, 저건 또 뭐냐, 저런 마초랑은 안 논다, 이것은 일차원.
분명 그 모습이 내 안에 있단 말이지.
분명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은 구성되잖아.
그러니까 그 모습을 네 안에서 발견하라고. 그런 식으로 접근을 해야지.
누구에게 죄책감을 주고 누구를 탓하고 그러지 말자니까. 탓하기 전에 자기부터.
함께 비난하기 전에 성찰부터.

결국은 다 잘 살자고 하는 짓 아니겠어요?
싸우는 게 목적이 아니란 말이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패널티 출산 장려 관련 JSC발제 이후.

우선 28일 JSC발제(자세한 사항은 정리해서 다시 포스팅)를 통해 이것저것 생각할 거리가 넘쳐나서 즐거웠다. 주제는 '패널티 정책을 통한 출산 장려 ...'였는데, 일단 '패널티'라는 용어에 다들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여 처음에 논의의 진전이 더뎠고, 의도적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용어 선택이 센스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패널티'라는 단어에 생각이 메여서 토론 내내 감정적인 자세로 일관하여 내용을 듣지 않는 자세는 더 센스가 없다고 생각한다.

인센티브 연구도 제대로 되지 않는 시점에서 패널티? 게다가 패널티의 정의도 인센티브를 적용하지 않는 것 자체도 사람들이 인지하기에 따라서는 패널티로 분류될 수 있다, 라는 입장이어서 더욱 애매해져버렸다.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언어를 사용할 때 고려되어야 하는 섬세한 부분들은 때로는 위험할 정도로 날카롭고, 다수가 그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에 따라 side effect 역시 엄청난데 말이다. 실질적으로 적용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이는 논문이지만, 일단 그런 제목을 단 논문이 나왔을 때 피상적 수준에서 논문을 이해하고 '패널티, 패널티, 아이 낳는 것은 사회적 의무다! 국민연금이 휘청이고 있다!'는 식으로 두려움을 조성하는 꼴통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걱정인 것이다.

JSC의 성실한 토론 자세를 보면 ‘저런 우익이면 공존이 가능하겠군.’이라는 생각과 (마치 나는 좌파라는 듯이!) 오히려 ‘female macho’랑은 도저히 공존할 수 없다는 생각. 논점을 흐리고 시각이 한 곳으로 매몰되어 마치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양 말이다. 더군다나 feminism 자체가 여자와 남자를 대립구도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늑대를 쫓는 사람은 늑대의 얼굴을 닮아간다고,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노무현이 좌파인 척 우파짓을 해서 애꿎은 좌파만 욕먹듯이 female macho 때문에 feminist들이 욕을 먹는다. female macho가 꿈꾸는 세상은 단순한 권력 교체, 그 이상 무엇도 아니다. 어쩔 때 보면 정말 권력의 전복을 꿈꾸는 투사처럼 말한다. female macho는 '여자도 군대 가라!'는 male macho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다.

토론 끝에 역시 귀결점은 신자유주의였는데, 논문이라는 것 자체가 누구의 시각에 의해 쓰여지고 비록 그 논문이 거친 형태일지라도 어떤 부분에 대해서 거친 입장을 취하고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삽질은 가상하였으나 기본 전제가 틀렸다는 말이다. 인식론적, 철학적인 물음이 부재하고 용어에 대한 고민 없이 바로 모델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였으니, 행정 공무원들이 일하는 것이 저렇기 때문에 가끔 생뚱맞은 정책들이 나오는 것이군, 이라는 생각.

노인은 부양받아야 하는 존재, 아이들은 부양해야 하는 존재로 설정해 놓고 연구를 진행하니 현실과 유리되는 것은 당연하다. 니트족이나 히키코모리와 같은 젊은이들을 부양자로 볼 수 있을까? 해멍 말로 '할아버지가 번 돈을 내가 쓰는' 일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역시 관건은 일자리 창출이고, 자본이 자국 내에서 돌면서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역량을 키우는 것이 우선인데. 생각해보면 우에노 치즈코 교수의 생각처럼 지금 필요한 것은 출산 정책이 아니다.

어쨌든 정말 오랜만에 머리가 말랑말랑해지는 좋은 토론이었다. 좀더 정리된 글로 쓰고 싶었으나, 일단 스치는 생각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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