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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30 :: 제대로 묻기 (20)
2007-1 성평등리더십의이해와실천

여휴가 왜 따로 있냐고요?

0620916 조지은

이번 쪽글 주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공학의 공학성에 대한 이야기일까? 공학이라고 하지만 실은 공학답지 못한 부분, 생물학적 성이 다른 한 쪽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공학의 시스템에 대한 성찰의 부재, 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 이 글에서는 가만히 오래 전부터 내가 고민하던 질문 하나를 던져본다.

난 ‘여학생 휴게실’의 열렬한 팬. 그런데 여휴가 왜 따로 있을까?

나는 ‘아싸’다. 아싸는 ‘아웃사이더’의 준말로 특정 집단에서 활동하지 않고 겉도는 사람을 일컫는다. 대부분 이럴 경우에는 그 집단에서 나와버리면 되기 때문에 이런 단어가 생겨날 틈이 없다. 그런데도 쓰이고 있는 ‘아싸’는, 나올 수도 없고 애초에 선택의 자유도 없는 ‘반’과 관련한 단어로 많이 사용한다. 작년 3월 한달 동안 ‘새내기’로서 그 많은 밥을 얻어먹으며, 나름대로 반 분위기에 적응하기 위해서 애써 보았지만 몇 가지 사건들이 있은 후에 결국은 박차고 나와버렸다. (그러고 보니 나 같은 아이들을 ‘먹튀’라고 부른다는 새로운 사실도 얼마 전에 알았다)

술자리에서 오가는 쓸 데 없는 이야기들, 1학년 여자 후배를 앉혀놓고 재미있다고 하는 성적인 발언들(우리가 그거 다 모르는 줄 알겠지?), 맞장구를 치고 같이 웃는 다른 선배들. 그 안에서도 ‘선배, 이러면 안 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분명 있기는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참자고 말하기 전에, 내가 왜 참아야 하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언제쯤이면 이 참는 것이 끝난다는 말인가? 나 못 참아. 눈 똑바로 뜨고 생각해보자. 어느 감독님의 스튜디오 이름처럼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박차고 나오니 캠퍼스의 전경이 그제서야 아름답더라, 하하하. 반에서 나오고 나니 불편한 점이 딱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학생회와 관련된 내용이 모두 반을 통해서 전달되기 때문에 아싸인 경우에는 접근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공강시간에 묵을 공간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여학생 휴게실을 들락날락했던 것 같다. 우리 학교에는 건물마다 잘 찾아보면 숨겨진 ‘여학생 휴게실’이 있다. 그 안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누워서 자기도 하고 구두를 벗고 발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잡지를 넘겨보기도 한다. 아, 좋다. 좋구나! “근데 왜 남학생 휴게실은 없는 거지?”

난 ‘여학생 휴게실’의 열렬한 팬. 여휴가 왜 따로 있을까?

밤에 집에 가는 길이었다. 한참 이런 저런 일들로 마음이 심난해서 이유 없이 방구석에만 처박혀 두문불출하던 시기였다. 집밖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는 오로지 아르바이트 하나였는데, 돈 때문에 머리채 잡혀 끌려나가는 기분에 항상 가슴 한 켠이 답답했다. 물 한 모금을 마셔도 별 나쁜 생각이 다 들던 때다. 홍대에 있는 카페에서 서빙을 했다. 알바가 끝나고 걷다가 담배를 한 대 태웠다. 지하철을 탔다. 취한 사람들로 공기가 온통 꼬여서 빌빌거렸다. 이런 시각이면 항상 좀더 일찍 내려서 버스로 갈아탄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아무 생각 없이 담배를 꺼내 드는데 순간 주춤했다. 그 시선들.

우리 집은 아주 평범한 주택가에 있다. 작은 시장이 하나 있고, 그곳을 통해 들어가면 지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아파트 단지가 있다. 우리 가족은 그 무수한 칸들 중 한 칸을 차지하고 산다. 집 주변에는 학원이나 슈퍼마켓, 동물병원, 세탁소, 운동화 빨래방 등이 있고 여대가 있는 쪽으로 가면 조금 번화한 거리가 나온다. 그러나 이곳은 홍대가 아니었지. 나는 결국 그 담배를 다 태우지 못 했다. 정류장에서 젊은 청년 하나와 아저씨 두 명이 담배를 태우면서도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뭐, 어쩌라고? … 어느새 나는 얌전하게 주머니에 라이터를 도로 넣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걷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렸다. 아무도 없는 집 앞 놀이터에 와서 혼자 씩씩거리며 한 대를 열심히 다 태우고 초라하게 들어갔다. 그 시선들. 내가 남자라면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난 ‘여학생 휴게실’의 열렬한 팬. 여휴가 왜 따로 있을까?

이미 나는 이 질문에 대답했다. 포인트를 찾아보시라!

‘아싸’나 ‘먹튀’와 같은 단어들이 어떻게 해서 쓰일 수 있게 된 것인지 하나씩 짚어 들어가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나는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보니, 아주 전형적인 아싸와 먹튀가 되어있었다. 1년 전에 ‘여학생 휴게실’이라고 선명하게 새겨진 글씨를 보면서 ‘도대체 이 학교가 어떤 학교이길래 이런 것이 따로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여학생 휴게실’이 따로 없는 학교가 이상하다. ‘도대체 이 학교가 어떤 학교이길래 이런 것이 따로 없단 말인가?’ 초등학교에서 배웠던, 말 그대로 불필요한 것은 치우고 필요한 것은 갖춰야 한다는 상식을 우리는 아직도 배운다. 간밤에 알림장을 펼쳐놓고 준비물 챙기던 만큼만 생각해본다면야 좋겠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총학생회장은 도대체 어느 초등학교를 나온 거야?
일단, 나임 여성학 수업 시간 적은 것.
페미니즘은 B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주장 할 거면 이 수업은 왜 듣나? 그냥 주장하면 되지.
문제는 B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자기 안에서 A와 B를 화해시키고 곱씹어보는 거지.
내 안에 있는 B를 보고 A를 보고 다 보면 좋겠다는 것이지롱.
그래 결국은 다 자기화잖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그래, 맞아. 난 억압되고 있었어!’라는 식으로 계몽되지 말 것.
그게 뭐냐!!! 그럼 안 배운 것만 못 하다.

뭐 이런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서 돌고 있고 카페에서 해멍, 위드와 수다 한 판.

페미니즘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거의 나흘 가까이 계속 고민하고 있음.
해멍이 나에게 ‘가만 있는 사람에게 페미니즘이 무슨 권리로 넌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거냐? 정말 행복한 상태에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냐?’ 물음. 일단 나는 페미니즘에 의해서 계몽된 타입이 아니라 어찌어찌 공감하고 재미있는 글들을 읽다보니 자꾸만 페미니즘에 가 닿은 거지. 그래서 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 했고, 여성학 선생님에게 질문하지 못 함.

멍에게 다시 물었다. 뭘 물은 거냐?

그걸 모르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들, 정말 그 상황에서 자기 상황에서 페미니즘이고 뭐고 알 필요도 없이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권리가 있는 건가? 페미니즘이 무슨 권리로?

문제는, 그렇지 않은 이데올로기가 있나? 사방에서 자기가 옳다고 외쳐대는데.
결국은 관점의 문제가 아닌가? 관점 없이 대화할 수 있나? 그건 불가능한데.

근데 왜 페미니즘만 그렇게 반감을 사고 부각되는 걸까? 여기로 질문을 돌려볼래. 이게 맞는 질문 같다.

과도기라서 극단적인 경우로 어필하기 때문인가?
페미니즘, 이란 단어 자체가 반감을 사고 있다는 것은 결국 그 단어가 낡았다는 거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단어를 바꿔봤자 똑같이 낡은 거 아닌가?
그 단어가 반감을 사는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 뭐라고 부르든 결국 반감을 사면 마찬가지.
단어 바꿔봤자다. 그건 낡은 것이 아니다. 이미 누군가에게 반감을 주거나 호감을 사고 있지 않은가?

그게 반감을 사는 맥락은 아마도 페미니스트랍시고 활동하는 사람 중에서 female macho의 어법을
구사하는 이들 때문이지 않을까? 그리고 말이 되지 않는 말을 구사하기도 하니까. 근데 그들이 제일 활발해!!! 맨날 싸워.

그러니까 페미니스트 집단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 말을 들어주지 않았을 때 아쉬운 건 그쪽이라고.
그러면 그것을 위해서 언어를 좀 더 다듬는 작업을 해야 하지 않아? 선동하지 말고.
‘오히려’ 여자가 더 이해를 못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어폐다. 같은 맥락에서 ‘여성해방주의’도 말도 안 되는 번역. 네가 뭔데 날 해방시켜? 나에 대해서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 거냐? 네가 전제를 하든 말든 일단 말하고 싶으면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안 되지 않나?

그런 식은 어떤 식?

너는 잘못 살고 있다. 깨어나라. 이런 식의 또 다른 우월주의.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다수다. 그러니 인정하라. 이것은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말.
다수와 소수. 도대체 수준이 얼마나 천박하길래 백만 인 정도 서명을 트럭으로 갖다 대야 이슈가 되는 건가?
나 혼자, 단 한 명이 말을 해도 들어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 식으로 숫자에 목매게 되면 결국 무관심과 냉소만 사게 된다. 나는 한 명이지만, 내가 이렇게 느낀다, 나는 이게 정말 불편하고 싫다, 가만 살고 싶은데 자꾸 이렇게 해야한다는 말들이 들어온다, 그게 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일상어로 푸는 게 좋지. 그리고 그게 꼭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읽히냐? 아니란 말이다. 어쨌든 그냥 말을 하면 되는 거고, 굳이 페미니즘을 들이대지 않아도 된단 말이다. 게다가 페미니즘을 들이댔을 때 더 많은 담론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는 나의 생각은 바뀜.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이란 단어 자체는 콘크리트 벽 쌓는 거나 마찬가지. ‘그건 네가 하는 말이지, 현실은 다르다.’ 그렇지만 인정하기 싫어도 둘 다 현실이란 말이지.

페미니즘 용어의 어폐.
백 년 전에 feminine의 어원에서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쓰게 된 것은 좋다, 그래 그게 통했겠다.
여성의 시각에서 소수자 시각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미 여자들이 많아지지 않았나? 그걸 여성주의나 여성해방주의라고 말 할 수 있나?
이게 ‘오히려’ 여자들이 이해 못 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이유.
이 쪽에서는 그런 여자들이 있을지 몰라도 저쪽에서는 알파 걸들이 초국적 권력 위에 하이힐을 신고 다닌단 말이지.
그리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공감해달라고 끌어당기지 말란 말이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죄책감 갖게 하지 말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일다 인터뷰에서 여성만 다루는 것이 싫다. 그러면 딱 보기 싫은 사람은 안 보거든.

이렇게 낡은 것을 이야기할 수는 있겠다. 대자보 붙이고 열라 글씨를 써봤자 내 눈에 들어오는 건
그래서 어쩌라고? 뿐이잖아. 그러니까 영화제도 기획하고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는 여지를 여는 것 아닐까?
요즘 사회적 기업과 대안적 기업을 구분하는데, 그것은 어불성설. 기업은 어쨌든 기본이 이윤창출.
그게 아니라면 시민단체나 NGO 같은 것이겠지, 새로 용어를 만드는 것은 뭐지?
기획력이 있는 사람들은 기업에서 사회공헌 프로젝트도 하고 영화제도 하고 축제도 열고 전시도 하고
그런 식으로 다양하게 접근한단 말이지. 그런데 낡은 방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선언문을 쓰고 있고.
뭔가 하고 싶다는 것은 알겠으나 이미 보기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인 세상인데. 어필해야 하잖아.
기업이고 시민단체고 그런 구분보다는 결국 기획력 있는 사람들은 자본과 함께 위에 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은 기업으로 간다. 왜? 돈이 있으니까. 그리고 더 잘 할 수 있으니까.

해석의 문제.
뭐야 난 안 그래, 저건 또 뭐냐, 저런 마초랑은 안 논다, 이것은 일차원.
분명 그 모습이 내 안에 있단 말이지.
분명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은 구성되잖아.
그러니까 그 모습을 네 안에서 발견하라고. 그런 식으로 접근을 해야지.
누구에게 죄책감을 주고 누구를 탓하고 그러지 말자니까. 탓하기 전에 자기부터.
함께 비난하기 전에 성찰부터.

결국은 다 잘 살자고 하는 짓 아니겠어요?
싸우는 게 목적이 아니란 말이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패널티 출산 장려 관련 JSC발제 이후.

우선 28일 JSC발제(자세한 사항은 정리해서 다시 포스팅)를 통해 이것저것 생각할 거리가 넘쳐나서 즐거웠다. 주제는 '패널티 정책을 통한 출산 장려 ...'였는데, 일단 '패널티'라는 용어에 다들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여 처음에 논의의 진전이 더뎠고, 의도적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용어 선택이 센스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패널티'라는 단어에 생각이 메여서 토론 내내 감정적인 자세로 일관하여 내용을 듣지 않는 자세는 더 센스가 없다고 생각한다.

인센티브 연구도 제대로 되지 않는 시점에서 패널티? 게다가 패널티의 정의도 인센티브를 적용하지 않는 것 자체도 사람들이 인지하기에 따라서는 패널티로 분류될 수 있다, 라는 입장이어서 더욱 애매해져버렸다.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언어를 사용할 때 고려되어야 하는 섬세한 부분들은 때로는 위험할 정도로 날카롭고, 다수가 그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에 따라 side effect 역시 엄청난데 말이다. 실질적으로 적용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이는 논문이지만, 일단 그런 제목을 단 논문이 나왔을 때 피상적 수준에서 논문을 이해하고 '패널티, 패널티, 아이 낳는 것은 사회적 의무다! 국민연금이 휘청이고 있다!'는 식으로 두려움을 조성하는 꼴통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걱정인 것이다.

JSC의 성실한 토론 자세를 보면 ‘저런 우익이면 공존이 가능하겠군.’이라는 생각과 (마치 나는 좌파라는 듯이!) 오히려 ‘female macho’랑은 도저히 공존할 수 없다는 생각. 논점을 흐리고 시각이 한 곳으로 매몰되어 마치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양 말이다. 더군다나 feminism 자체가 여자와 남자를 대립구도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늑대를 쫓는 사람은 늑대의 얼굴을 닮아간다고,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노무현이 좌파인 척 우파짓을 해서 애꿎은 좌파만 욕먹듯이 female macho 때문에 feminist들이 욕을 먹는다. female macho가 꿈꾸는 세상은 단순한 권력 교체, 그 이상 무엇도 아니다. 어쩔 때 보면 정말 권력의 전복을 꿈꾸는 투사처럼 말한다. female macho는 '여자도 군대 가라!'는 male macho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다.

토론 끝에 역시 귀결점은 신자유주의였는데, 논문이라는 것 자체가 누구의 시각에 의해 쓰여지고 비록 그 논문이 거친 형태일지라도 어떤 부분에 대해서 거친 입장을 취하고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삽질은 가상하였으나 기본 전제가 틀렸다는 말이다. 인식론적, 철학적인 물음이 부재하고 용어에 대한 고민 없이 바로 모델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였으니, 행정 공무원들이 일하는 것이 저렇기 때문에 가끔 생뚱맞은 정책들이 나오는 것이군, 이라는 생각.

노인은 부양받아야 하는 존재, 아이들은 부양해야 하는 존재로 설정해 놓고 연구를 진행하니 현실과 유리되는 것은 당연하다. 니트족이나 히키코모리와 같은 젊은이들을 부양자로 볼 수 있을까? 해멍 말로 '할아버지가 번 돈을 내가 쓰는' 일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역시 관건은 일자리 창출이고, 자본이 자국 내에서 돌면서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역량을 키우는 것이 우선인데. 생각해보면 우에노 치즈코 교수의 생각처럼 지금 필요한 것은 출산 정책이 아니다.

어쨌든 정말 오랜만에 머리가 말랑말랑해지는 좋은 토론이었다. 좀더 정리된 글로 쓰고 싶었으나, 일단 스치는 생각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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