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듣다가 남궁연이 부모님의 죽음과 기억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건, 가만히 있다가 전혀 상관없는 그런 황당한 순간에 갑자기 퍼뜩 떠오를 때죠. 아무 일 없이 잘 살고 일도 잘 하고 방송도 하고 그러고 있다가, 정말 갑자기 '아, 돌아가셨구나'하는 생각이 확 떠오르는 거에요. 그럼 눈물이 왈칵 나와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가 있어요."
죽음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 없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가 문득 지난 시간들 속에 새겨진 흔적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가령, 라면을 먹다가 예전 남자친구 생각을 하는 거랄까? 라면을 자주 먹는 편은 아닌데, 아침에 해장을 한다거나 어쩌다 구미가 당기는 날이 있으면 한 번씩 먹곤 한다. 얼마 전에도 간단하게 배나 채워볼까, 하는 생각에 라면을 꺼냈다. 애초에 엄마가 라면을 끓이는 식으로 내가 배운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물을 끓인다.
2. 라면 사리를 넣는다. 작은 부스러기까지 탈탈 털어서.
3. 빨간 스프를 넣은 다음에 야채스프를 넣는다.
4. 계란을 넣고 다 끓으면 먹는다.
지금 내가 끓이는 방식은 이렇다.
1. 물을 끓인다.
2. 빨간 스프를 넣어서 미친듯 끓고 있는 물을 진정시킨다.
3. 물이 평정을 되찾으면 라면 사리를 넣는다.
4. 야채 스프를 넣는다.
5. 파송송 계란탁으로 마무리, 맛있게 먹는다.
6. 봉지 안의 라면 부스러기는 그냥 버린다.
A는 나에게 맛있는 라면을 끓여주겠다고 부산스럽게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라면 사리도 넣지 않았는데 빨간 스프부터 넣는 것을 보고는 무심코 물었다. "어라? 그렇게 하면 어떡해, 라면도 안 넣었는데." "라면을 넣고 스프를 넣으면 스프가 골고루 퍼지지 않잖아. 원래 스프를 먼저 넣고 라면을 넣어야 맛있어. 그리고 이렇게 하면 물의 끓는점이 올라 가서 팔팔 끓지 않아도 된다구." 오, 똑똑하구나. 듣고 보니 그렇네.
B도 나에게 맛있는 라면을 끓여주겠다고 부산스럽게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반으로 쪼갠 라면만 넣고서는 봉지를 버리는 모습에 또 무심코 물었다. "어라? 탈탈 털어서 넣어야지, 아깝게 그걸 왜 다 버려?" "어차피 부스러기는 바닥에 남아도 잘 먹지 않는데, 뭐. 깔끔하게 사리만 먹으면 되지." "에이, 그래도 밥 말아 먹으면 같이 떠먹을 수 있잖아." "밥까지 말아먹으려면 하나만 끓일 걸, 이미 두 개나 넣었으니 라면만 먹자." 오, 이것도 듣고 보니 그렇군.
B는 '라면은 국물 맛'이라면서 맑고 청명한(?) 국물을 얻기 위해 계란을 넣는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탁한 국물을 뜨게 되더라도 계란이 있어야 보기 좋고 먹기 좋다고 주장했다. 안 그러면 새빨간 것이 너무 심심하잖아. 식탁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는, 라면 위에 살며시 얹어진 노른자를 보면서 A와 B를 생각했다. 내가 원래부터 라면을 이렇게 끓인 것은 아니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