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바캉스 리뷰(2006-07-31)
녹색광선 The Green Ray 1986 프랑스 color 98min. 에릭 로메르
7.25화 17:00 / 7.30일 15:30 / 8.1화 20:30 / 8.2수 15:30
"녹색광선을 아세요?"
"아뇨, 뭐죠?"
시네바캉스에 가게 되면, 반드시 러브스토리를 보고 나서 팜플렛을 꼭 품에 품고 극장을 걸어 나오고 싶다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얼마 전부터 생각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아트시네마라는 장소는 많은 사람들에게 첫사랑의 향수를 간직한 아련한 공간이라는 느낌 때문이다. 서울아트시네마를 이야기할 때면 많은 사람들이, ‘내가 소년 시절에 그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내지는 ‘옛 애인과 추운 겨울에 한참 종로 거리를 걷다 보면…….’라면서 눈을 가늘게 뜨곤 한다. 러브스토리란 그런 장소에서 볼 때 더욱 아련할 테니까. 영화 <녹색광선>은 제목만 보면, 눈에서 빔을 쏜다는 귀신이 콩콩 뛰어다니는 어설픈 SF영화의 타이틀 같다. 그런데, <녹색광선>에서는 눈에서 빔 쏘는 귀신이 나오지 않을 뿐더러, 알고 보니 베갯밑에 두고 자꾸 꺼내 보고 싶은 소설책 같은 영화였다.
꽃잎을 곱게 빻아 손톱에 붉게 물들인 봉숭아 물이 첫눈이 올 때까지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첫사랑이 오지 않던 시절에는 첫사랑을 기다리며, 첫사랑인가 고개를 갸우뚱 할 적에는 그 사람을 생각하며, 또 첫사랑은 이미 지났구나ㅡ 할 적에는 다시 그런 설렘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래서 첫눈은 언제나 솜사탕처럼 보송보송한 설렘을 지녔던 기억이 난다. <녹색광선>의 델핀에게 정이 가는 것은, 남몰래 붉게 물 들인 그녀의 새끼손톱을 살짝 봐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델핀은 무척이나 소심하고 변덕스러운 여자이다. 도대체 뭘 먹고 사는 것인지, 자신이 먹지 않는 음식들에 대해 식탁 위에서 손짓 발짓까지 해 가며 설명을 하는 채식주의자. 떠나고 싶다면서도 곧바로 파리로 돌아와 또 다시 전화를 붙들고 있는 델핀에게 언제부터 정이 가기 시작한 걸까. 바캉스는 얼마 남지 않았고, 날짜는 하루 이틀 지나간다. 에릭 로메르는 날짜를 하루 이틀 넘기면서, 델핀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지 어떨지는 관심도 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는 것 같다. 나는 어서 손에 쥔 카드를 보여달라고 떼 쓰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다음 장면을 기다리게 된다.
살며시 손에 쥔 카드를 펴 보이듯이, 델핀의 사랑도 그렇게 찾아 온다. 조심스러운 만남에 이래저래 불평 하면서도 결국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은 누군가를 기다려요.’라고 입을 삐죽이는 델핀에게 그는 가만히 웃어주고,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한다. 사랑이 오는 것인가, 할 때에 이미 영화는 온통 풀빛으로 싱그럽게 채워져 있다. 삐죽거리는 그녀의 대사에 간간이 터져 나오는 관객들의 웃음과, 영화 속의 소소한 수다들을 함께 느끼며 <녹색광선>은 참 소설 같은 영화구나, 했다. 진득하게 이어지는 수다들이나, 조용하게 주고 받는 대사들, 가만히 해변가를 거니는 델핀. 이 영화는 배꼽을 쥐어 잡을 장면이나, 숨이 넘어가게 펑펑 울고 싶은 비극은 없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행운이 올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든다. 꼭 쥐었다가 펴 보인 손바닥에는, 네잎 클로버 한 송이가ㅡ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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