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철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내가 받은 철학 교육이란, 윤리 교과서에서 철학자들을 출생 순서대로 늘어놓고 달달 외운 것이나 논술 시간에 쓸 인용문을 유심히 본 기억밖에 없기 때문이다. 철학사에서 철학자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 것을 따라가면서 그들의 논의에 관심을 두었다면, 철학 공부가 이처럼 피상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떠오르는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내 친구 중 누구는 처음 책을 펴고 철학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에게 철학과 관련하여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독서를 시도한 경험은 사르트르였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구절 때문에,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와의 대화 주제가 ‘나의 알을 깨는 문장은?’이 된 적이 있었다. 나는 “신경림님의 초기 시, ‘갈대’의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럼없이 대답하였는데, ‘갈대’를 읽고 나서 그것이 실존주의적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에 어디선가 보았던 사르트르를 찾아 도서관 구석의 철학 코너를 더듬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나의 시도는 실패했다. 어느 소설가가 ‘너는 청년기에 실존주의 서적을 뒤적이겠지. 그러다가 대학에 가면 마르크스를…….’ 이라고 말하는 대목을 읽고, 내가 그렇게 사소해보일 수가 없었다.
사르트르를 시작으로 그 뒤에 나의 고민에서 시작하여 쇼펜하우어나 푸코, 부르디외의 이름과 계속 부딪히는 경험을 하면서 몇 번 더 철학책을 빌렸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대부분은 너무 난해하거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것들이었고, 넘치는 개념어와 그 방대한 양에 겁만 잔뜩 먹었을 뿐이다. 한글을 안다고 모든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 때 알았다. 그 후에 개괄적인 서적을 구입하고서는 논술 공부할 때 쓰라는 식으로 만들어진 피상적인 목차에 다시 한 번 질려 버렸다. 이렇게 되면서 나는 점점 내 물음에 대해 철학적으로 독서할 기회를, 알량한 저자들에 의해 혹은 학교나 선생님에 의해 박탈당하거나 스스로 그것을 도피하기 시작했다. 논술은 내 생각이 아니라 남의 의견을 짜깁기 해놓아 형식 안에 틀어박아놓고, 운 좋게 대학에 왔다.
처음에 많은 정치학 관련 도서들 중에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주저 없이 선택한 이유는 오직 하나, 그것이 내가 아는 제목의 책이었으며 목록에 있는 책들 중에서 가장 먼저 쓰인 고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서양사상의 뿌리를 짚어보겠다는 기분으로 집중하여 책 한 권만 읽었다. 처음에는 표지에 ‘지은이 아리스토텔레스’라고 씌어있는 것을 보며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는 ‘행복은 완전한 덕을 따른 정신의 활동’이며, ‘성품은 각기 대응하는 활동에서 생긴다.’고 말하고 있는데,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특히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혔던 이유는, 2학기 동안 학내외로 활동하면서 생겼던 물음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이번에도 나는 운이 좋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용’
아리스토텔레스는 처음에 인간을 위한 선으로 말을 시작한다. “모든 인간의 활동은 어떤 선을 추구한다. 어떤 선은 다른 선에 종속한다.” “인간을 위한 선을 추구하는 학문은 정치학”이다. 그리고는 “덕 있는 활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행동하며 또 잘 행동한다.”는 믿음을 갖고 덕에 대한 고찰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는 ‘악행은 오로지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했던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반박하면서, 알면서도 악을 행하는 것은 절제가 부족한 탓이라는 이야기를 7장에서 전개하기도 한다. 또한 처음에 선에 대해서 언급할 때나 악덕도 이성적인 부분일 수 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플라톤’에 대해 반박하기도 한다. 이상주의자인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에게서 상식주의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보는 것 같아 흥미롭다.
그는 선에 이르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상황들에 관련하여 ‘실천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실천지’이란, 사람들이 외부적으로 그것을 추구할 지라도 표면적인 ‘선’에 도달하기 위하여 행동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말한다. 좋은 행동이란 습관에서 우러나는 것이며, 행동은 궁극적인 선, 즉 ‘행복’을 목표로 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는 완전할 수 없다. 특히 좋은 행동이 ‘습관’에서 우러난다는 부분에 주목하고 싶다. 무지에서 악행이 비롯된다고 하였던 소크라테스나 악덕은 비이성적인 부분이라고 하여 논의의 장에서 제외시킨 플라톤의 경우와는 다르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성에서 무절제한 부분을 인정하고 후천적인 노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행복’은 완전한 덕을 따른 정신의 활동”을 의미하는데, 덕은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으로 나눠진다. 지적인 덕은 기술, 실제 생활의 지혜, 직관적 이성, 철학적 지혜 등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이 중에서도 특히 행위에 관계되는 작은 지적인 덕은 ‘이해력’과 ‘판단’이다. 도덕적인 덕은 특히 윤리학의 초석을 다지는 내용들에 관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도덕적인 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은 ‘중용’이다. 그는 용기, 절제, 돈, 사교 등에 걸쳐서 중용의 경우와 그렇지 않은 양 극단의 경우에 대하여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극단은 서로 대립하며 또 중용에도 대립한다.” 여기서 실제로는 극단끼리 서로 통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더욱 흥미롭다.
내 평생의 화두
자신에 대한 물음에서 철학책을 뒤지기 시작했다는 친구가 나에게 묻기를, “너는 평생의 화두가 무엇이냐”고 하였다. 평생의 화두는 결국 나 자신에 관련된 것이 아니겠냐며, “당분간 나의 화두는 ‘일과 놀이의 일치’일 것 같고, 평생의 화두는 ‘자기 긍정’이 될 수도 있겠다.”는 대답을 하였다. 대학에 와서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며 실망하는 순진한 친구들을 볼 때 마다, 나도 그들과 같은 고민에 과거에는 열병을 앓을 정도로 괴로워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천재를 그리워하는’ 선생님들 혹은 ‘천재가 되기를 강요하는’ 학교에서 낳은 학생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당시 내게 세상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눠볼 수 있었는데, ‘자기 긍정에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과 ‘자기 부정에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 그것이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후자에 속했고, 나이가 먹을수록 ‘열등감’을 동력으로 삼는 일은 나 자신을 해치는 일이라는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한동안은 일부러 지나치게 나를 긍정하는 모습을 스스로에게 길들이고자 하였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내가 스스럼없이 내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하는 사람이 되어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할수록, 어떤 때는 지나치게 경솔해져서 스스로도 무안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자괴감에 빠져서 나에 관련된 모든 것을 부정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나에 대해 긍지를 가지려 할수록, 허영심에서 비롯되는 자기기만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극과 극이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몸으로 느끼게 된 경험이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으면서 흐릿했던 부분들이 논리에 비춰 밝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 바로 ‘중용’과 관련한 부분이었다. 가령 용기와 관련한 덕을 이야기할 때 중용은 ‘용기 있음’이고 과도한 경우는 ‘경솔함’, 그 반대는 ‘비겁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경솔한 사람은 비겁한 모습을 보일 경우가 많으며, 비겁한 사람의 경우 경솔해지기 쉬운데 이것은 나의 경우처럼 극단에 있는 사람일수록 겉으로 중용의 모습을 갖추고자 하기 때문이다. 중용의 덕을 갖추기 위해서는 직관으로 응시하고 철학적 지혜로 탐구하여 들어가 행위로써 행복에 이르려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다른 극단을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먼저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자기암시는 힘이 될 수 있겠지만, 자기기만과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처음에 일기를 ‘자발적으로’ 다시 쓰기 시작하면서, 즉 실질적으로 처음 일기를 쓰기 위해서 펜을 들었을 때부터 계몽적인 어조를 구사하며 스스로에게도 솔직하지 못했던 나를 기억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나의 글쓰기는 여전히 상표를 받기 위해 글 쓰던 초등학생의 글이었다. 꾸중보다 칭찬은 얼마나 더 교묘하고 치밀한지. 글쓰기와 관련하여 나 스스로를 기만하는 글들은, 써놓고 보면 누구나 대번에 알 수 있다. 내가 만들어놓은 내면의 허깨비가 내 글을 검열하고 수치스러운 부분을 잘라내서 온통 누더기만 남은 단어뭉치들을 마주한 적도 많았다. 이제는 그러한 일들이 나 자신을 조금씩 갉아먹는다는 것을 안다. 현실은 잔인할 수도,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미화된 현실은 위험할 뿐이다.
유용한 철학
아직도 나의 물음은 현재 진행형이다. 어쩌면 평생 동안 계속될지도 모르겠다.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파고들수록, 묘하게도 사람과 세상에 대한 애착이 생긴다는 점을 느끼고 있다.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은 전부 상대적이다’라는 소피스트적 회의주의에 빠져 있던 일 년 전이라면 애초에 가질 수도 없던 생각이다. 그 때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었다면, 선과 이데아에 대한 논의가 뜨겁게 읽혔을 것이다. 지금 나의 삶과 관련하여 화두는 ‘자기긍정’이기 때문에 내게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중용’을 중심으로 덕의 실천과 관련하여 읽히고 이러한 글이 나오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맑아진 동시에 ‘조금 더 혼란스러워도 괜찮아.’라고 말할 만큼 용기가 생긴 것 같다. 철학 역시 글쓰기처럼 묘하게 즐거운 맛이 있다. 그만큼 삶과 착 붙어 있는 동시에 유용한 것도 없으니까.
A. 우리의 탐구의 주제
제1장 인간의 모든 활동은 어떤 선을 추구한다. 어떤 선은 다른 선에 종속한다.
제2장 인간을 위한 선을 연구하는 학문은 정치학이다.
B. 이 학문의 성질
제3장 우리는 주제가 허용하는 것 이상의 엄밀성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정치학도는 분별 연령(14세)에 도달해 있어야만 한다.
C. 인간을 위한 선은 무엇인가?
제4장 행복이 인간을 위한 선임은 일반적으로 합의되고 있지만,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맨 처음에 요구되는 것은 사실들에 관한 솔직한 확신인데, 이러한 확신은 좋은 교육에서 얻어진다.
제5장 선을 쾌락,혹은 명예, 혹은 부라고 하는 통속적 견해를 논한다. 넷째 종류의 인생, 즉 명상 내지 관조의 생활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하기로 한다.
제6장 선의 이데아가 있다고 하는 철학적 견해를 논한다.
제7장 선은 궁극적이고 자족적인 어떤 것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특징적 기능을 고찰함으로써 도달한 행복의 정의
제8장 이 정의는 행복에 관한 일반적인 신념에 의하여 확인된다.
제9장 행복은 학습이나 관습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인가, 혹은 신이 보내주시는 것인가, 또 그렇지 않으면 우연히 얻게 되는 것인가
제10장 살아있는 동안은 아무도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인가
제11장 살아있는 사람의 운수는 죽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제12장 덕은 칭송할 만한 것이지만, 행복은 칭송을 초월해 있다.
D. 덕의 종류
제13장 심적 능력의 구분, 그리고 이 구분의 결과로 덕을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으로 구분하는 일
제2~5권 도덕적인 덕
(제2권 제1장~제3권 제5장 전반적 설명)
A. 도덕적인 덕은 어떻게 생기며, 어떤 소재 속에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가?
제1장 기술과 마찬가지로 덕은 거기 대응하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습득된다.
제2장 이런 행위가 어떤 것인지는 정확하게 규정지을 수 없지만, 그러나 과도와 부족을 피하는 것이어야 한다.
제3장 유덕한 행위를 하는 데 기쁨을 품는 것은 유덕한 심적 경향이 습득된 표적이다. 여러 가지 고찰은 도덕적인 덕이 쾌락 및 고통과 본질적으로 결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제4장 도덕적인 덕을 생기게 하는 행위는 도덕적인 덕에서 흘러나오는 행위와 똑같은 의미에서 선한 것은 아니다. 후자는 기술의 경우에는 필요치 않는 몇몇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B. 도덕적인 덕의 정의
제5장 그 유개념, 그것은 성격의 상태이지 마음의 움직임이나 능력이 아니다.
제6장 그 종차, 그것은 중용을 선택하는 심적 경향이다.
제7장 이 명제의 특수한 덕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C. 극단의 상태와 중간의 상태의 특징:
여기서 따라 나오는 실제적 결과
제8장 극단은 서로 대립하며 또 중용에도 대립한다.
제9장 중용은 도달하기 힘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각에 의하여 파악되는 것이지, 추리에 의하여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D. 도덕적인 덕의 내면: 행동에 대한 책임의 조건
제1장 칭찬이나 비난은 유의적 (즉 자유 의지에 의한) 행동, 즉 ①강제되지 않고 ②주위의 사정을 알고 한 행동에 대해서만 하게 되는 것이다.
제2장 도덕적인 덕이라고 하면 벌써 거기에는 행동이, ③선택에 의하여 행하여졌다는 뜻이 들어 있다. 선택의 대상은 선택에 앞서는 심사숙고의 결과이다.
제3장 심사숙고의 성질과 그 여러 대상, 선택이란 우리 자신의 힘이 미치는 사물에 대한 신중한 욕망이다.
제4장 이성적인 욕구의 대상은 목적이다. 즉, 선 혹은 외견상의 선이다.
제5장 우리는 좋은 행동에 대해서도 또 나쁜 행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제3권 제6장 ~ 제5권 제11장 덕과 악덕)
A. 용기
제6장 용기는 공포와 태연의 감정에 관계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전투에 있어서의 죽음의 공포와 관계되는 것이다.
제7장 용기의 동기가 되는 것은 수치심이다. 용기에 반대되는 악덕, 즉 비겁과 경솔의 특징
제8장 잘못되어 용기라고 불리는 다섯 가지 용기
제9장 고통과 쾌락에 대한 용기의 관계
B. 절제
제10장 절제는 촉각의 몇 가지 쾌락에 국한되어 있다.
제11장 절제와 이에 반대되는 방종 및 '무감각'의 특징
제12장 방종은 비겁보다 더 유의적이다. 방종한 사람을 버릇없는 아이에 비김.
C. 돈에 관계되는 덕
제1장 관후, 방탕, 인색
제2장 호탕, 속악, 쩨쩨함
D. 명예에 관계되는 덕
제3장 긍지, 허영, 겸손
제4장 야심, 야심 없음, 그리고 이 둘의 중간
E. 노여움에 관계되는 덕
제5장 온화, 화를 잘 내는 성미, 화를 낼 줄 모르는 성미
F. 사교상의 덕
제6장 우애, 발라맞춤, 버릇없음
제7장 진실성 있음, 큰소리치는 것, 비꼬기를 잘 하는 것
제8장 재치 있는 것, 우스꽝스럽게 구는 것, 촌스러움
G. 덕 비슷하나 덕은 채 되지 못하는 것
제9장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 수줍어하는 것,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
H. 정의
(1) 그 범위와 외부적 성질. 어떤 의미에서 정의는 중용인가?
제1장 합법적인 것으로서의 정의(보편적 정의)와 공정하고 평등한 것으로서의 정의(특수한 정의). 전자의 고찰
제2장 후자의 고찰. 분배적 정의와 시정적 정의로서의 구분
제3장 기하학적 비례에 일치하는 분배적 정의
제4장 등차급수에 일치하는 시정적 정의
제5장 교환에 있어서의 정의, 비례에 일치하는 호혜 관계
제6장 정치적 정의와 그와 유사한 종류의 여러 가지 정의
제7장 자연적 정의와 법적 정의
(2) 선택의 내적 성질
제8장 악행의 정도와 척도
제9장 일부러 부당한 대우를 스스로 취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분배에 있어서의 부정은 분배자의 탓인가, 분배를 받는 자의 탓인가? 정의란 얼핏 보면 분명하고 알기 쉬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정의가 하나의 행동 양식이 아니고, 마음속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제10장 법적 정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는 옳음
제11장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부당하게 취급할 수 있는가
제6권 지적인 덕
A. 개설
제1장 지적인 덕을 고구하는 이유. 지성을 인식적 부분과 사량적 부분으로 나눔
제2장 전자의 대상은 진리, 후자의 대상은 올바른 욕망에 대응하는 진리이다.
제3장 학문- 필연적이고 영원한 것에 대한 확증이 있는 지식
B. 지적인 덕의 주요한 것들
제4장 기술- 물건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지식
제5장 실제 생활의 지혜
제6장 직관적 이성- 학문을 우러나게 하는 원리의 지식
제7장 철학적 지혜- 직관적 이성과 학문의 일치
제8장 실제 생활의 지혜와 정치학의 관계
C. 행위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작은 지적인 덕
제9장 사려를 잘 하는 것. 이것과 실제 생활의 지혜와의 관계
제10장 이해력- 실제 생활의 지혜의 명령적 성질에 대응하는 비판적 성질
제11장 판단- 옳은 것을 잘 분간하는 것. 도덕에 있어서의 직관의 위치
D. 철학적 지혜와 실제적 지혜의 관계
제12장 철학적 지혜와 실제적 지혜는 어떤 데 쓰이는가? 철학적 지혜는 행복의 형상인이다 실제적 지혜는 도덕적인 덕이 원하는 적절한 목적에 대하여 적절한 방법을 쓰게 한다.
제13장 실제적 지혜가 자연적인 덕, 도덕적인 덕 및 올바른 규칙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
제7권 자제와 자제하지 못함, 쾌락
A. 자제와 자제하지 못함
제1장 성격의 6가지 종류, 취급방법. 일반적인 여러 가지 견해
제2장 이 여러 견해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가지 모순
제3장 어떤 의미에서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알면서 좋지 않은 행동을 하는가 하는 문제의 해결
제4장 자제력이 없는 것의 범위는 어떠한가 하는 무제의 해결. 자제력이 없는 것의 본래의 의미와 확대된 의미를 구별함
제5장 확대된 의미에서의 자제력이 없는 것은 금수적 형태와 병적인 형태를 포함한다.
제6장 노여움에 관계하여 자제력이 없는 것은 본래의 의미의 자제력이 없는 것보다 덜 추하다.
제7장 부드러움과 참을성 있음, 자제력이 없는 것의 2가지 형태- 약함과 성급함
제8장 방종은 자제력이 없는 것보다 더 나쁘다.
제9장 자제력이 있고 자제력이 없는 것, '냉담', 절제와의 관계
제10장 실제적 지혜는 자제력이 없는 것과 양립할 수 없으나, 영리는 자제력이 없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
B. 쾌락
제11장 쾌락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세 가지 견해 및 이 견해들을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논의
제12장 쾌락은 선이 아니라고 하는 견해를 논함
제13장 쾌락은 주요한 선이 아니라고 하는 견해를 논함
제14장 대부분의 쾌락은 나쁘다고 하는 견해 및 신체적 쾌락을 쾌락 일반과 동일시하는 경향을 논함
제8,9권 우애
A. 우애의 종류
제1장 우애는 필요하고도 고귀한 것. 우애에 관한 주요 문제
제2장 사랑의 세 대상. 우애가 의미하는 것
제3장 여기 대응하는 우애의 세 가지 종류. 동기가 좋은 우애의 우월성
제4장 최선의 종류의 우애와 그만 못한 여러 가지 종류의 우애와의 비교
제5장 우애의 상태를 우애의 활동 및 친애의 감정과 구별함
제6장 세 종류의 우애 사이의 가지각색의 관계
B. 우애의 상호성
제7장 불평등한 우애에 있어서는 일종의 균형이 유지되어야 한다.
제8장 사랑하는 것이 사랑을 받는 것보다 우애의 본질에 더욱 어울린다.
C. 우애의 상호성과 공동체의 상호성과의 관계
제9장 우애와 정의의 평행성. 국가는 그보다 약소한 모든 공동체를 내포한다.
제10장 국가 체제의 분류. 가족 관계와의 유비
제11장 여기 대응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우애 및 정의
제12장 친족간의 우애의 가지각색 형태
D. 우애의 여러 난점
제13장 봉사 교환의 원칙. (a)동등한 입장의 사람들 사이의 우애에 있어서
제14장 (b)동등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우애에 있어서
제1장 (c)동기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우애에 있어서
제2장 여러 가지 책무의 서로 다른 양상
제3장 우정을 깨뜨리게 되는 여러 가지 경우
E. 우애의 내적 본성
제4장 우애는 자애에 기초하고 있다.
제5장 우애와 호의의 관계
제6장 우애와 합심의 관계
제7장 선을 베푸는 일의 쾌감
제8장 참된 자애의 본성
F. 우애의 필요
제9장 왜 행복한 사람은 친구를 가져야 하는가
제10장 친구의 수에 대한 제한
제11장 친구는 운수가 좋을 때에 더 필요한가, 그렇지 않으면 불운한 때에 더 필요한가
제12장 선한 사람들의 우애는 좋은 것
제10권 쾌락,행복
A. 쾌락
제1장 쾌락에 관한 상반되는 두 견해
제2장 쾌락이 선이라고 하는 견해를 논함
제3장 쾌락은 전적으로 나쁘다는 견해를 논함
제4장 쾌락의 정의
제5장 쾌락을 낳고 또 완성시키는 행동에 여러 가지가 있듯이 쾌락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쾌락의 가치 기준
B. 행복
제6장 행복이란 좋은 활동이지 오락이 아니다.
제7장 최고의 의미에 있어서의 행복은 관조적 생활이다.
제8장 관조적 생활의 우월성을 더 추궁하여 고찰함
제9장 우리의 목적이 달성되려면 입법이 필요하다. 정치학으로 넘어가는 대목.
우선 책을 한 번 읽고 나서 느낀 점은 내 독서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말을 하자면 아마 반도 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 더 일찍 책을 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짧게라도 글을 쓸지 말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무엇이든 시도와 경험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용기를 내본다. 고민 끝에 결국은 처음에 마음먹은 대로, 이 책이 어떠한 지식을 제공해주었는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 책과 나의 만남이 나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는지에 대하여 짧지만 결코 쉽지 않은 글을 써보려 한다.
고등학교 때 문과, 이과로 나눠서 잘못된 경쟁의식을 투영하여 두 분과를 암묵적으로 경쟁시키는 시스템(주로 ‘그 학교에서는 어느 과에서 대학을 많이 가느냐?’ 하는 문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과학철학 분야에 대해서는 간간이 읽은 신문 기사 글이 전부였다. 그러나 결국 철학은 한 뿌리라는 생각을 해보면, 생각의 틀이 과학이라는 분야에서 실질적으로 어떻게 투영되는지 그에 대한 독서를 조금 더 늘려서 균형 있는 사고를 해야겠다는 것이 나의 첫 번째 감상이다. 학문의 분과가 세밀하게 이뤄져 타 분야에 대해서는 선을 긋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결국은 모두 인간에 대한 것 하나라는 점을 잊지 말고 나의 관심영역을 한정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겠다.
요즘 나의 관심은 근대에서 형성된 철학으로 뻗어가고 있다. 아마도 탈근대의 과도기에서 근대적 자아와 탈근대적 자아가 혼란을 일으키는 부분이 많아서 그러한 고민을 하게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가령 곳곳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소중하고 미시사에 대해 탐독 하다가도, 불현듯 ‘완전한 개인’이라는 천재에 대한 동경심이 솟구쳐 열등감에 시달리는 밤을 보내곤 한다. 이것은 작게는 나의 고민이지만, 크게는 동시대에 걸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양상이라고 느끼고 있다. 그에 대한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지금은 예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모두가 예술가’라면서 동시에 근대 아카데미 혹은 살롱에서부터 구체화된 ‘전시회’나 ‘박물관’ 안팎을 예술과 비예술로 구분하려는 경향이 있다. ‘보는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영상에 익숙한 세대라 이미지가 넘치는 것에 대해 무감각해질 정도였는데, 고등학교 때 집을 떠나 하숙을 하게 되면서 TV를 보지 않게 되고 그러면서 내가 그동안 이미지에 엄청난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의 수다에 전혀 공감을 할 수 없었다. 정보가 흐르는 속도를 느낀 것도 난생 처음 겪는 오묘한 경험이었다. 내가 활자와 영상을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세월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경험 속에서 이미지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을 상대화시키거나 그에 대한 경계심을 갖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이미 몸은 ‘보는 문화’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대중매체를 멀리 하면서 비로소 그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나에게 화두는 언제나 ‘나’이다. 직접적으로 내가 인지할 수 있는 분야는 나의 시각과 나의 생각과 나의 몸에 대한 것이 일차적이기 때문에 모든 관심은 ‘나’의 경험과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 책도 같은 맥락에서 수학자이자 신학자인 저자의 정체성 고민에서 탄생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에 대한 고민이 확장되어 시공간적인 분야를 넘어선 곳까지 공부의 범위가 넓어진 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하자면 부러우면서 동시에 신선한 자극을 받게 된다. 이 책을 내가 스스로 집어든 것이 아니라 과제였기 때문에 집어든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지금 나의 감수성을 건드려주는 부분이 있었기에 고마운 마음이다.
나의 모태신앙은 기독교이다. 태어나서 고등학교의 입시에 시달리게 되기 전까지 십육년 정도를 교회에 다녔다. 성경이 품고 있는 신화적 스토리텔링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졌지만, 나의 인생관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성경공부를 해도 기독교가 신앙으로서 와닿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사상으로서 느껴졌다. 그렇지만 철학과 마찬가지로 종교가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실제로 세상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말하자면 신앙이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 이상의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물론 사상적으로도 기독교의 성찰이 예술이나 철학 등 여타 많은 부분들에 영감을 주었던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는, 영적으로든 지적으로든 굳이 그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모태신앙에 대한 반감과, 남미 역사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종교의 폭력성에 아직도 몸이 예민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각자가 모두 그 안에 신을 품고 있고, 그에 대한 깨우침은 자신의 경험 안에서 이뤄진다. 가끔 친구 중 기독교 신앙을 사진 사람이 있다면 그 친구를 위해서 함께 기도해주곤 한다. “나는 일상을 믿고 상상력과 사람들을 믿지만, 네가 마음이 편해진다면 너의 신을 위해 기도해줄게.”
아직 그런 일은 없었지만 만일 라마교나 이슬람교 친구를 두게 된다면 그 친구의 신앙에 맞는 방식으로 그의 행복을 빌어줄 것이다.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내 안의 갈등은 이 글 만큼이나 정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에 대한 고민을 포기하지 않고 관심의 영역이 좀 더 넓은 범위까지 확대되어서, 공부할수록 멍청해지는 것이 아니라 공부할수록 현명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
아도르노가 지적했듯이 현대의 예술은 철학과 상보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 오늘날의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작품의 빈약성과 철학의 풍성함을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늘날 비평은 작품 이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성립 자체에 참여한다. 과거에는 어떤 대상이 작품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기준이 작품 밖에 미리 존재했지만, 오늘날 예술은 자신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정의를 자기 안에 품고 나와야 한다. 뒤샹이 소변기로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이 새로운 예술의 정의다. 오늘날 예술에 '주제'라는 게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왜 예술인가'하는 것이리라. 이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 때문에 오늘날 예술은 비평에 결정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 때문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철학과 밀접한 공모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中
전시를 다닐 때마다 작가들의 코멘트를 보면 대개 너다섯 줄을 한 문장으로 써놔서 머리가 아팠다.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돌아나올 때에는 작품의 빈약성 때문에 항상 아리송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최근에 다녀온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Dual Realities'의 경우에는, 나오는 길에 불쾌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왜 기분이 나쁜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그런 언어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갈수록 언어를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을 느낀다. 그래서 유려한 문장보다는 거친 문장이 끌리고, 어려운 단어일수록 도발적으로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