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  말많은마리 0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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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 소리가 많다는 것은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_-)

2006-2 기독교와 현대사회 과제

“너의 신을 위해 기도해줄게.”

우선 책을 한 번 읽고 나서 느낀 점은 내 독서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말을 하자면 아마 반도 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 더 일찍 책을 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짧게라도 글을 쓸지 말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무엇이든 시도와 경험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용기를 내본다. 고민 끝에 결국은 처음에 마음먹은 대로, 이 책이 어떠한 지식을 제공해주었는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 책과 나의 만남이 나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는지에 대하여 짧지만 결코 쉽지 않은 글을 써보려 한다.

고등학교 때 문과, 이과로 나눠서 잘못된 경쟁의식을 투영하여 두 분과를 암묵적으로 경쟁시키는 시스템(주로 ‘그 학교에서는 어느 과에서 대학을 많이 가느냐?’ 하는 문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과학철학 분야에 대해서는 간간이 읽은 신문 기사 글이 전부였다. 그러나 결국 철학은 한 뿌리라는 생각을 해보면, 생각의 틀이 과학이라는 분야에서 실질적으로 어떻게 투영되는지 그에 대한 독서를 조금 더 늘려서 균형 있는 사고를 해야겠다는 것이 나의 첫 번째 감상이다. 학문의 분과가 세밀하게 이뤄져 타 분야에 대해서는 선을 긋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결국은 모두 인간에 대한 것 하나라는 점을 잊지 말고 나의 관심영역을 한정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겠다.

요즘 나의 관심은 근대에서 형성된 철학으로 뻗어가고 있다. 아마도 탈근대의 과도기에서 근대적 자아와 탈근대적 자아가 혼란을 일으키는 부분이 많아서 그러한 고민을 하게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가령 곳곳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소중하고 미시사에 대해 탐독 하다가도, 불현듯 ‘완전한 개인’이라는 천재에 대한 동경심이 솟구쳐 열등감에 시달리는 밤을 보내곤 한다. 이것은 작게는 나의 고민이지만, 크게는 동시대에 걸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양상이라고 느끼고 있다. 그에 대한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지금은 예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모두가 예술가’라면서 동시에 근대 아카데미 혹은 살롱에서부터 구체화된 ‘전시회’나 ‘박물관’ 안팎을 예술과 비예술로 구분하려는 경향이 있다. ‘보는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영상에 익숙한 세대라 이미지가 넘치는 것에 대해 무감각해질 정도였는데, 고등학교 때 집을 떠나 하숙을 하게 되면서 TV를 보지 않게 되고 그러면서 내가 그동안 이미지에 엄청난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의 수다에 전혀 공감을 할 수 없었다. 정보가 흐르는 속도를 느낀 것도 난생 처음 겪는 오묘한 경험이었다. 내가 활자와 영상을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세월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경험 속에서 이미지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을 상대화시키거나 그에 대한 경계심을 갖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이미 몸은 ‘보는 문화’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대중매체를 멀리 하면서 비로소 그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나에게 화두는 언제나 ‘나’이다. 직접적으로 내가 인지할 수 있는 분야는 나의 시각과 나의 생각과 나의 몸에 대한 것이 일차적이기 때문에 모든 관심은 ‘나’의 경험과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 책도 같은 맥락에서 수학자이자 신학자인 저자의 정체성 고민에서 탄생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에 대한 고민이 확장되어 시공간적인 분야를 넘어선 곳까지 공부의 범위가 넓어진 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하자면 부러우면서 동시에 신선한 자극을 받게 된다. 이 책을 내가 스스로 집어든 것이 아니라 과제였기 때문에 집어든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지금 나의 감수성을 건드려주는 부분이 있었기에 고마운 마음이다.

나의 모태신앙은 기독교이다. 태어나서 고등학교의 입시에 시달리게 되기 전까지 십육년 정도를 교회에 다녔다. 성경이 품고 있는 신화적 스토리텔링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졌지만, 나의 인생관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성경공부를 해도 기독교가 신앙으로서 와닿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사상으로서 느껴졌다. 그렇지만 철학과 마찬가지로 종교가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실제로 세상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말하자면 신앙이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 이상의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물론 사상적으로도 기독교의 성찰이 예술이나 철학 등 여타 많은 부분들에 영감을 주었던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는, 영적으로든 지적으로든 굳이 그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모태신앙에 대한 반감과, 남미 역사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종교의 폭력성에 아직도 몸이 예민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각자가 모두 그 안에 신을 품고 있고, 그에 대한 깨우침은 자신의 경험 안에서 이뤄진다. 가끔 친구 중 기독교 신앙을 사진 사람이 있다면 그 친구를 위해서 함께 기도해주곤 한다. “나는 일상을 믿고 상상력과 사람들을 믿지만, 네가 마음이 편해진다면 너의 신을 위해 기도해줄게.”

아직 그런 일은 없었지만 만일 라마교나 이슬람교 친구를 두게 된다면 그 친구의 신앙에 맞는 방식으로 그의 행복을 빌어줄 것이다.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내 안의 갈등은 이 글 만큼이나 정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에 대한 고민을 포기하지 않고 관심의 영역이 좀 더 넓은 범위까지 확대되어서, 공부할수록 멍청해지는 것이 아니라 공부할수록 현명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

과학으로 기독교 새로 보기  현우식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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